PD는 조감해야 해

세월 가니 보이네 ㉔

by 김승월

나는 종종 너무 가까이만 보며 살았다. 눈앞에 닥친 일에 매달리느라, 조금만 물러서면 보였을 것들을 놓친 날이 적지 않았다. 숨이 차도록 달려놓고도, 어디로 가는지 깨닫지 못한 때가 있었다.


라디오 새내기 PD 시절이었다. 6.25 특집을 만들게 되었다. 음악을 곁들인 드라마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라디오드라마 제작은 옆에서 지켜봤지만, 직접 연출한 적이 없어서 흔들렸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담당 부장이 라디오드라마 베테랑 황기찬 PD였다. 뭔가를 일러주길 기대했는 데, 스튜디오 가기 직전에 딱 한마디 했다.

“PD는 조감해야 해.”


하늘 높이 나는 새처럼 멀리 보고 넓게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해설, 성우, 음악담당, 효과맨, 제작진을 두루 살피라는 말로도 들렸고, 프로그램의 부분보다 전체를 먼저 보라는 주문처럼 들렸다. 어렴풋하게 짚혔지만, 막상 연출하게 되니 두루 살피기가 힘겨웠다.


프로그램에는 시작이 있고 끝도 있다. 모든 부분이 이어져야 하니, 부분만 살펴서는 그르친다. 성우에는 주연이 있듯, 조연도 있다. 어떤 장면은 앞으로 나서고, 다른 장면은 물러서서 받쳐준다. 힘을 주었다가 빼기도 하고, 사라진 것을 다시 끌어 놓는 게 연출이다. 내 방송인생 내내 '조감'은 연출의 화두가 되었다.


얼마 전,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에서 전시한 인상파 그림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폴 세잔의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붓질은 거칠었지만 한 발 물러서자 화면이 꽉 차 보였다. 앞쪽의 키 큰 나무들, 그 사이로 보이는 집, 저 멀리 희미한 작은 봉우리들. 하나하나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함께 어울려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 앞에서 오래전 PD 할 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PD는 조감해야 해.”

세잔.jpg 자 드 쿠팡 근처의 나무와 집들/ 폴 세잔 그림

화가야말로 조감하지 않고서는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일도 같지 않을까. 함께 일하는 사람을 골고루 살피고, 내가 하는 일도 전체 흐름 속에서 보려고 애써야 하지 않을까.


인생도 마찬가지다. 늘 곁에 있는 가족의 일에만 매달리다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놓칠 때가 있었다. 잘되는 날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도 번갈아 왔다. 손해 보는 날이 있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실패하는 건 아니었다. 가까운 한 장면에만 매달리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을 길로 친다면, 완만한 길과 가파른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숨차게 뛰어야 할 구간도 있고, 숨 고르며 걸어가도 될 곳도 있다. 무작정 달릴 수도, 내내 긴장 풀고 갈 수도 없다.


그때는 연출의 기술로 들렸던 그 말이, 이제는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되었다.

“PD는 조감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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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세월 가니 보이네>

다음 주에는 계절 속의 계절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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