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의 연기
‘불광불급(不狂不及)'
성우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성우 배한성 씨가 그렇게 답했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라는 말이죠. “미치지 않으면 목적에 다다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배한성 씨는 뛰어난 성우로 잘 나가는 방송인이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는 물론, 외화 더빙에서 ‘맥가이버’, ‘아마데우스’ 등에서 놀라운 목소리 연기를 보여주어 인기를 모았고요. 뒤에는 라디오진행자, TV MC로도 활동한 방송인입니다. 그분이 말했던 ‘연기자의 자세’를 다시 들어봅니다.
“‘불광불급’ 不狂不及 이란 말처럼 미치지 않으면 거기에 도달하지 못
합니다. 혼신의 연기라는 게 정말 미친 듯이 하는 거죠. 미친 듯이
하지 않으면 고객인 청취자 분들이 감동을 못 받거든요. 그렇게 해야
나도 일하는 보람이 있고. 아무리 혼신의 연기를 다 한다고 해도
100% 만족할 수는 없어요. “맥가이버를 잘했다, 가제트를 잘했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역을 너무 잘했다”, 다른 분들은 “100점이다.
100점 이상이다.”그래도 저는 제 연기에 대해서 80점 이상을 준
적이 없어요. 절대 겸손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려고 했지만
부족한 겁니다. 연기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해야만 하는 겁니다.”
저는 2011년에 MBC라디오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를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배한성 씨와 라디오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자였습니다.
제가 <라디오레시피 23>에 썼던 배한성 씨에 대한 기억입니다.
“배한성하면 잊을 수 없는 NG 경험이 있다. 90년대 후반이었다.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을 리메이크하는 라디오 특집을 했다. 주인공 영진역을 캐스팅할 때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미치광이의 성격을 표현할 수 있으면서 변사 어투로도 연기할 수 있는 성우를 찾았다. 고민 끝에 배한성을 캐스팅했다. 쉽지 않은 역이었지만 그는 무난하게 소화했다. 마지막 장면을 녹음할 때, 나의 그 못난 버릇이 나왔다. 쥐어짜서라도 조금 더 나은 장면을 뽑아내고 싶었다. NG 아닌 NG를 냈다. 다시 한번 해보자고.
“힘이 없어서 더 잘 나올 수 없어요.”
배한성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스튜디오에 밀어 넣다시피 해서 다시 녹음을 했다. 녹음을 하자마자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의 말 그대로 진 빠진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한성은 의자에 털썩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으며 더 이상 소리가 안 나온다고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혼신의 연기란 바로 이런 거구나.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서 연기한 거였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효과맨 차부안이 한마디 거들었다.
“잘 나가는 사람들, 다 이유가 있는 거야.”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고, 미친 듯이 한다고 해서 제대로 이루는 것은 아니죠. 방향이 바로 잡혀야 합니다. 요셉수도원의 이수철신부님은, 2023년 1월 21일 강론에서 ‘불광불급’을 말씀하셨는데요.
“불광불급, 미쳐야 미칩니다.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참사람의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무지성, 무이성, 무상식의 폐인이요 말 그대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폐인이나 괴물 같은 이들을 주변에서 목격하기도 합니다.”
오디오 연기자가 되려면 제대로 미쳐야 미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