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가니 보이네 ⑭
"아들만 있으면 고독사 하게 돼요."
아들 하나뿐인 그 사람이, 딸 하나뿐인 나보고 들으라고 한 말이다. 그와 나는 같은 해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나이에는 동창들 모임에 가면, 으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친구들 모임에서 '안락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었던 말이란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가 함께 한 자리에서다. 아들, 딸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는 은퇴한 뒤 상처까지 하니, 고독사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전화 주고 챙겨주는 데는 아들보다 딸이 났지 않냐고 덧붙였다. '딸은 출가 후에도 살갑게 구는데, 아들은 좀처럼 전화도 안 한다'라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친구가 거들었다.
"자매들은 나이 들수록 어울려 사는데, 형제들은 늙어서도 다투기 일쑤야."
말이 씨가 된다더니, 예전에 들었던 구호가 현실화된듯하다.
"잘 키운 딸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있는 걸로 알고 살던 내게, 아내는 결혼 전부터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전했다.
"여자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여성으로 길러지는 거예요."
성 역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펼쳤다.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물들게 되었다.
나의 하나뿐인 아이가 딸이다. 아들 못지않게 자라길 바랐다. 장난감으로 인형도 주었지만, 로봇도 사 주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여성이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나누었다. 물론 아내는 한술 더 떴다.
그래서일까. 딸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살고 있다. 고모가 조심스럽게 내게 한 말이 있다.
"자기 본성하고 다르게 키워져서 힘들어했던 거 같아."
그 말이 맞는지 나는 딸에게 불어보진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제부턴가 하기 시작했다.
왜 그리 느리냐고 나무랐더니 딸이 그랬다.
"아빠 보기에는 내가 느리지만, 다른 여자 들은 나더러 급하다고 해"
딸은 전형적인 '여성성'과 조금은 다른 성향을 갖게 된 셈이다.
얼마 전, 70대 여성이 혼자서 하는 옷 수선집에 다녀왔다. 오전에는 일 하지 않는다기에, 왜냐고 물었다.
"오전에는 평생 고등학교에 다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안에서 아들만 공부시켜서, 국민학교만 마쳤다고 했다. 그게 늘 아쉬워 이 나이에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 학생들도 많지요?"
"전교생 중에서 할아버지는 단 한 명도 없어요."
할머니는 마포구에 유일한 평생교육 중고등하교인 일성여고를 다니고 있다.
마포구에는 시니어들이 다니는 남녀 공학고등학교는 없고, 여고만 있다. 다른 지역의 남녀공학평생교육 고등학교의 남녀 비율을 알아보기 위하여, 청암고등학교를 소개받아 알아봤다. 전교생 640명 중에서 남성은 30여분, 나머지는 여성들이란다.
대학에서 12년 동안 강의했다. 나만 느낀 건지는 모르겠다만, 성적면에서는 여학생들이 늘 남학생들보다 앞섰다. 발표도 더 자주 하고, 조장이나 대표도 여학생들이 먼저 나설 때가 많았다. 성적이 낮으면 눈물 흘리며 호소하는 학생들도 주로 여학생들이었다.
순전히 내 개인적 인상으로 하는 말이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배움의 욕구가 강하고, 자세도 다르다. 남성들은 부딪치며 혼자 배우는 경우가 많고, 여성들을 배워서 제대로 익히는 거 같다.
젊어서 수영장에 처음 갔을 때였다. 어려서 혼자 익힌 방법으로 수영하는데, 한 후배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형, 저수지 헤엄치지 마. 남들 하는 거 봐. 얼굴을 물에 넣고 해야 해."
살펴보니, 나 혼자 고개 쳐들고 개헤엄 치고 있었다.
내 주변 남자들은 대부분 혼자 수영을 익혔다. 내 아내와 딸은 수영강습받고 시작했다.
주변에서 스포츠를 배우는 모습을 보면,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많고, 진지해 보인다. 여성들은 배워서 익히는 분들이 많아서 알까. 남자들은 제대로 배우려 들지 않아서 그럴까. 내 눈에는 수영도, 탁구도, 골프도, 헬스장에서도 기량이나 힘 말고 자세만큼은 여성들이 비교적 반듯해 보인다.
라디오 PD로 일 할 때도 그랬다.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남성 후배는 드물었다. 여성 후배는 모르는 걸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편이었다. 노트에 받아 적는 후배도 보았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햄릿'의 대사인 이 말은 분명, 한 면을 두고 한 말이다.
인간은 다면체다. 누구나 강한 면이 있으면 약한 면이 있다. 약한 면이 있으면 강한 면이 있다.
강하고 강한 사람이 있어 보이지만 그들도 약점이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신체적으로는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다.
배움에 있어서는 여성이 세다.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세월가니 보이는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