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게 하는 생각
"네 각시 아직 곱더라."
명동성당에서 딸 결혼식을 치르고 난 뒤, 친구 성대가 멀찍이 있던 아내 쪽을 보며 내게 한 말이다.
우리 집의 숙원 사업이었던 이 경사스러운 자리를 아내는 쑥스럽고 민망해했다. 척추 치료를 받아, 휠체어를 타고 하객을 맞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안 보이는 자리에 있으라는 말도 나왔었다. 하지만 아내는 휠체어에 앉아 식장 입구를 지켰다.
아내는 딸의 결혼식에 누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내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도, 끝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아내에게 성대의 한마디는 짓누른 무게감을 덜어주는 따뜻한 손길이 되었다.
식을 무사히 마치고 긴장이 풀렸던 아내는 친구의 그 말을 듣고는 생기가 돌았다. 모처럼 활짝 피어난 꽃 같았다. 친구가 고마웠다. 어쩌면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예술 같은 말'을 날리나.
아내는 두고두고 칭찬했다. 친구 귀가 간지러웠을지 모르겠다.
"당신 고등학교 친구 민성대 씨, 참 센스 있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였던 아내로서는 꼭 듣고 싶었던 말을 그가 해준 셈이다.
이런저런 병치례로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그 말은 아직도 힘이 되고 있다.
남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말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오래전에 참석했던 주 모임에서다. 한 회원은 잘 풀린 아들을 두었고, 변호사 며느리를 봤다.
"지난주에 변호사 며느리가 초대해 주어서, 아들 손주들과 그 식당에서 저녁 식사 했어. 햐아, 그 식당 괜찮던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와 함께, 자식과 함께 복에 겹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모임 때마다 이어갔다.
나로서는 축하해 주어야 마땅한 이야기인데, 가슴 한쪽이 조여왔다.
당시, 내 외동딸은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사위, 며느리 이야기만 나오면,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상처하고 혼자 사는 분도 있었다. 빤히 사정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을 위한 봉사도 꽤나 하는 분이 왜 그순간은 남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았을까.
내 기분에 빠져서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다 보면 남의 마음을 찌르게 된다.
나 역시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농담했는데 진담으로 받아들여 사과하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무르고, 말은 생각보다 날카롭다.
그런 점에서 민성대는 남 다르다.
고등학교 친구 부부 세 쌍을 모시고, 불암산 요셉수도원 다녀오는 길이었다. 요즘 나는 운전하지 않아서, 성대 차에 동승했다. 동부간선도로에 들어서서부터 차가 밀리더니, 강변북로에서는 더 막혔다. 친구는 서대문이 집인데 일부러 여의도에 들러 나를 내려주고 가야 하니 미안했다. 중간에 내려달라고 하자, 투덜댔다.
"너, 왜 날 나쁜 사람을 만들려고 그러니?"
당황한 나에게 그는 천천히 말했다.
"내가 데려다 주기로 했으면 데려다주어야지, 중간에 그만 두면 내가 약속을 어긴 사람이 되잖니. 그리고 너는 몸도 불편한데...... 친구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말투는 투박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부담이 되지 않으려 몸을 낮추려는 내 마음을, 그는 그렇게 감싸주었다.
이 친구의 말솜씨는 브런치 매거진 <병상에 누우니 보이는 것들>, '꽃보다 말벗'편에 소개했었다.
장기 입원으로 입맛 잃고 있던 내게,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전화를 했다.
https://brunch.co.kr/@40587eb4eae64f9/165
"...... 여의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 성대가 전화했다.
'병원 밥 먹기 지겹지? 맛있는 거 사줄까?'
잠시 후, 깜찍한 문자가 왔다.
'메뉴 골라 보세요. 1. 어복쟁반 2. 생선구이 3. 바싹 불고기 4. 해초정식 5. 초밥 6. 양지설렁탕.'
......
'토요일 저녁 6시, 차 가지고 갈게. 벚꽃길 드라이브하고, 저녁 먹고 병원에 데려다줄게.'"
병원 출입 제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그의 섬세한 마음씀에 며칠 동안 즐거운 상상을 즐겼다.
어쩌면 그리 말 잘하냐고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싱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상대 마음을 알게 되지. 그러면 할 말이 편하게 나와"
어울리다 보면, 배울만한 사람들이 꽤 있다. 부분만 보면 그런 점이 누구에게나 있다.
책만큼 사람도 배움의 스승이 된다.
누군가의 말만 잘 들어봐도 삶이 깊어진다.
말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친구는 말의 기술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말의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마음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