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으니, 맛이 더 또렷해졌다 - 소믈리에 최은영

보이지 않아도 보이네 ⑪

by 김승월

와인의 색을 말하지 않는 소믈리에가 있다. 잔을 들고 코를 가까이 가져가서, 잠시 멈춘다. 그리고 한 모금 머금었다가 넘기고는 말한다.

“타닌이 강한 레드와인이에요. 늦가을, 낙엽 떨어지는 날, 다락방에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죠.

시각장애인 소믈리에 최은영의 설명이다. 그의 와인에는 빛깔 대신 풍경이 있다.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시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고들 한다. 흔히는 청각을 떠올리지만, 후각과 미각에 주목한 사람들도 있다. 장애인의 일자리 가능성을 넓혀 온 기업 ‘하티웍스’( Heartyworks)다.


하티웍스는 그동안 170여 명의 장애인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주었다. “시각장애인은 안마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고정관념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재택 한국어 전화 교육도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실험이 이어졌다. 하티웍스 박경이 이사의 말이다.

“시각장애인의 후각과 미각을 살려, 소믈리에라는 직무를 만들었습니다.”


하티웍스에서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김세린, 정은교, 최은영 3명을 선발하여 시각장애인 소믈리에 교육을 했다. 그리고 그들을 내세운 블라인드 소믈리에 행사를 열었다. 지난해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서울 강남구 도멘청담에서 ‘시각을 넘어선 와인 시음회(Wine Tasting Beyond Sight)’다. 그 행사에 참여한 소믈리에 최은영을 그녀가 사는 동네 커피숍에서 만났다.


마주 보고 앉자마자 그녀에게 물어봤다.

"술 좋아하세요?"

"예, 엄청 좋아해요. 막걸리 말고는 다 좋아해요, 소주, 맥주, 위스키. 코냑도 좋아해요. 하하하"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무척 우습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블라인드 소믈리에 행사에서도, 손님의 첫 질문이 '술 좋아하세요?' 였어요."


그때도 소주, 맥주, 위스키, 코냑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특히 헤네시 코냑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첫 질문한 손님이 헤네시 코냑 수입사 대표였어요. 답변 너무 잘했다고 하더라고요."


턱시도를 입고 디캔딩 퍼포먼스를 하던 순간은 특히 긴장됐다고 한다. 몇 달을 연습했지만 손이 떨렸다. 그래도 손님들과 와인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단다.

“손님들이 호응을 잘해주어 감사했어요.”

image.png 왼쪽부터 최은영 소믈리에와 하티웍스 박경이 이사, 정은교 소믈리에/출처 : G밸리타임스

어떻게 소믈리에를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저는 새로운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최은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회계사 사무소에 취업해 돈을 벌었다. 10년쯤 지났을 때, 시각장애가 갑자기 찾아왔다. 시신경염이었다. 감당하기 벅찬 나이, 스물아홉에 시력을 잃었다. 직장에서 나왔고, 모든 게 멈춘 듯했다. 여행을 좋아하고, 활동적이던 그녀는 아예 문밖을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스스로 집 안에 가뒀어요.”


친구들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 밥을 먹이고, 술을 함께 마시고, 다시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최은영은 또박또박 말했다.

"장애인은 누군가가 끄집어 내줘야 해요."


불교 신자인 그녀는 충북 단양 구인사에서 3년을 기도하고 봉사하며 지냈다. 가장 크게 얻은 건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었다.

“결국은 마음먹기 나름이더라고요. 장애를 받아들이게 됐어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그는 하티웍스의 한국어 전화교육 강사가 됐다. 베트남, 러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국 취업을 꿈꾸던 학생 중 한 명은 실제로 유학 오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도전. 시각장애인 소믈리에 선발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훈련은 3개월간 이어졌다. 이론 교육, 테이스팅 훈련, 서비스 실습. 프랑스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오래된 와인이 상했는지(부쇼네)를 더 잘 알아맞힌다는 이유로 소믈리에로 환영받는다고 한다. 비장애인도 눈을 가리고 블라인드 테스트하기도 한다. 은영

“먼저 코로 느끼고, 입에 머금고, 넘기며 판단해요.”


시력을 잃은 뒤 미각이 예민해졌다, 그는 국물 맛만 보고도 식재료를 맞힌다.

“'멸치, 다시마, 북어머리, 무, 양파, 대파… 다 들어갔네요'라고 말하면 요리한 분들이 놀라세요.”


시각 정보가 줄어들면, 뇌는 다른 감각을 더 많이 사용한다. 시각 피질 일부가 후각과 미각 처리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소믈리에는 라벨, 가격, 색에 덜 흔들린다. 대신 향, 질감, 여운 같은 '맛의 본질’에 집중한다.


와인은 그냥 마셔도 좋지만, 음식과 함께할 때 맛이 더 살아난다. 소믈리에가 페어링 할 음식을 추천해 준다.

“스테이크 먹고 레드 와인 마시면 고기 향이 와인에 스며들어요. 서로 맛이 좋아져요.”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라서 추천해 줄 음식이 많다.


와인의 매력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와인은 다양해요. 오늘 날씨, 행사, 감정에 따라 골라서 즐길 수 있어요. 기분 맞출 때나 분위기 바꿀 때는 와인이 좋아요."


시각장애인은 쉽게 고립된다. 그래서 더 말할 기회가 필요하다. 소믈리에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이다. 서울 한복판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로 일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소믈리에는 경험이 많이 있어야 돼요. 지금도 집에서 남편이랑 와인 마시면서 훈련해요.”


하티웍스 박경이 이사는 올해도 블라인드 소믈리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한다.


최은영은 오늘도 향을 맡고, 잔을 기울인다.

와인의 색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맛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madeline-liu-dqRtvMaH1Ng-unsplash.jpg By Madeline Liu on Unsplash

브런치북 <보이지 않아도 보이네>

다음 주에는 인제군의 시각장애인 활동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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