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제를 만드는 실명퇴치운동본부 회장최정남
치료제를 만드는 환자단체 실명퇴치운동본부 회장 최정남
“그런 소리, 20년 전에도 들었습니다.”
해외에서 치료제 개발 소식이 나왔다는 말을 전해주었더니, 한 시각장애인이 서늘하게 말했다.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꺼낸 말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 차가웠다.
“황우석 사태 때도 다들 들떴지요. 이제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희망에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희망이라는 말이 너무 여러 번 늦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실명퇴치운동본부 최정남 협회장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환우들에게 ‘희망’이라는 말은 때로 허망한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희망을 직접 만들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최정남은 희망을 말로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다. 희망을 직접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그는 한때 대우그룹에서 일하던 상사맨이었다. 퇴사 후에는 무역회사를 차려 분주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골프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밤길에서는 맞은편 차의 불빛이 유난히 번졌다. 주차하다 기둥에 부딪치는 일도 잦아졌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대학병원을 찾았고, 두 시간 넘는 정밀검사 끝에 진단을 받았다. 망막색소변성증. 서서히 시력을 잃게 되는 희귀 질환이었다.
의사는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하던 사업부터 정리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치료 방법을 모른다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매일 인터넷을 뒤졌고, 해외 단체 홈페이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소식을 모았다. 의학용어와 생물학 용어는 낯설고 어려웠다. 그래도 공대 출신이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찾아낸 자료를 번역해 홈페이지에 올렸고, 환우들에게 알렸다. 그렇게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의 전도사가 되었다. 협회의 학술이사를 맡았고, 나중에는 협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본보기로 삼은 것은 미국의 실명퇴치재단이었다. 오랜 역사와 연구 기반을 갖추고, 막대한 후원을 받아 치료제 개발을 밀어온 단체였다. 환자단체가 연구를 돕고, 기금을 모으고, 실제 치료제 개발의 한 축을 맡는 구조였다. 최 회장은 그 점이 늘 안타까웠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민간 질환단체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 선입견을 깨기 위해 그는 발 벗고 나섰다. 서울대 안과와 연구 기반을 마련했고, 한국망막변성협회 설립기금을 출연하고 등록을 도왔다. 지금도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에는 망막질환을 연구하는 전문의 60여 명이 참여해 치료 연구를 돕고 있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다.
“쌀 사주고 연탄 사주는 복지는 낮은 단계의 복지입니다. 눈을 밝혀주는 복지로 가야 합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명퇴치운동본부는 <망막질환 유전자 해설집>을 펴냈고, 유전자 검사를 무료로 지원하며 데이터를 모아 임상시험의 바탕을 만들고 있다. 해마다 여름캠프를 열어 최신 치료법을 소개하고, 공연과 마라톤대회로 기금을 모은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7년에는 미국 환자단체의 지원을 받아 치료제가 미국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깐이었다. 그 약은 특정 유전자 하나만을 대상으로 하는 치료제였고, 망막질환과 관련해 밝혀진 유전자 변이는 300가지가 넘는다. 무엇보다 가격이 너무 높았다. 몇 억대였다. 환자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준이었다.
최 회장은 다시 움직였다. 건강보험 적용을 위해 뛰었고, 환자의 부담을 낮추기 위해 제도와 협의했다. 지금은 환자가 약 600여만 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공단의 도움을 받는 수준까지 왔다. 접근성은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진국 약은 서구인을 중심으로 개발된 데다 너무 비쌉니다. 돈 많은 나라 사람만 치료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국이 값싸고 질 좋은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을 품고만 있지 않았다.
환자단체 주도로 치료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결국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 환자들의 모금이 이어졌고, 3억 원의 자금이 마련되었다. 동물실험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하는 선행연구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2023년 10월, 희귀 난치성 안과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싱귤래리티바이오텍'이 세워졌다. 최정남 회장과 류정묵 건양대 의대 교수, 박태관 순천향대 부천병원 안과 교수가 함께 창업했고, 최 회장이 대표를 맡았다.
신약 개발은 멀고 험한 길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임상에는 막대한 자금이 든다. 정부 예산과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준비 과정에서 숱한 벽에 부딪혔다고 했다. 지금은 상사맨 시절보다 훨씬 더 고단하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그의 희망은 거기서 더 커졌다.
“선진국 약은 인류 보편의 약이 아닙니다. 돈 많은 나라 사람만 치료받아서는 안 되죠. 반도체처럼 한국에서 세계적인 바이오회사가 나와야 합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눈을 밝혀주는 값싸고 질 좋은 약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의 꿈에는 신념이 배어 있다.
“반도체가 좋은 모델입니다. 바이오산업도 결국 정교함이 중요하지요. 한국인의 치밀함과 손기술을 살리면 바이오 한국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 앞에는 여전히 그릇된 사회인식과 깊은 선입견이 놓여 있다. 환자단체가 무슨 치료제를 만드느냐는
차가운 시선도 있다.
하지만 오래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희망이 얼마나 쉽게 닳아 없어지는지.
그래서 더 귀하다. 그 닳아가는 희망을 말이 아니라 일로 붙들고 있는 사람은.
최정남은 아직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다.
치료를 앞당기려는 사람이기도 하다.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겪고 나니 보이는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