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건 아니지만, 불행하지도 않아요/마라토너 김미순①

미치지 않으면 못해요, 사파트레일런

by 김승월

"한발 올라가면 두발 미끄러져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산길이 가풀막졌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아차 하면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고 들었다. 김미순은 남편이 잡아준 끈, 트러스트 스트링(신뢰의 끈)이 이끄는 대로 무거운 발을 뗐다. 한 발을 올려 디뎠다가 다른 발을 떼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했다. 남은 길은 아직도 멀다. 앞이 안 보여 신경 쓰다 보니 땀도 많이 흘렸고, 체력 소모도 많았다. 도저히 제한 시간 안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발을 떼며 혼잣말했다.

"가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사파출발.jpg 사파트레일런, 베트남 산악 마라톤 출발 (Vietnam Mountain Marathon) 사진:VMM

베트남 사파에서 열린 사파트레일런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산악 마라톤(Vietnam Mountain Marathon) 대회다. 참가자 중에서 시각장애인은 한국의 김미순뿐. 그녀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한다.


김미순은 남편 김효근과 함께 참가했다. 전국에서 지인 7명이 모여 함께 했다. 산뜻하게 출발했다. 날아갈 것 같았다.


"아네스, 왼쪽에 마을이 보이네, 오른쪽에는 논이다. 앞으로 일 킬로쯤 가면서부터 오르막이 나와."


아네스는 그녀의 가톨릭 세례명. 남편은 코스를 설명하면서 달렸다. 보이는 풍경도 들려준다.


"야, 바나나 나무가 참 많다. 야자수도 있고."


미순은 남편이 설명하는 대로 상상한다. 야자수 숲길을 달렸다.


소의 울음소리가 길게 깔렸다. 사이사이 염소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먼 곳에서 낮닭이 울었다. 달리는 길이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소수민족이 산다는 마을이다. 뛰다 보면 소하고 같이 가기도 한다.


김미순은 풀코스를 380번도 더 달렸다. 우리나라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한반도를 수직으로 달리는 국토 종단 622킬로도 두 번 뛰었다. 강화도에서 강릉 경포대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국토횡단도 여덟 차례나 한 울트라 마라토너다. 몽고에서 뛰어봤고, 캄보디아에서도 달려봤지만, 베트남 사파는 비교가 안되게 힘들었다. 험준한 길이 이어졌다.

VMM-Sapa-qi1vlbxuqqjapfi0xz5i9beaw44wzpknfbb3ea6pk0.jpg 사파트레일런 사진: VMM

20킬로 미터가 넘어서부터 고비가 왔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못 왔다. 일 킬로 가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이러다 남편 잡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그녀에게 밀려왔다.


오토바이 소리가 다가왔다.


"타!, 타!, 타!"


어색한 억양의 한국말이다. 베트남 청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지친 한국인 러너를 태운다. 물론 오토바이를 타면 신발을 벗는 거다. 중도 포기를 그녀는 '신발 벗는다'고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미순은 남편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사파는 베트남 북서쪽, 중국 접경지역으로 지형이 아름답고 험난하다. 대회는 해발 1,500미터 지점에서 출발해서 해발 2,200여 미터 산길을 오르내린다. 코스는 10킬로, 21킬로, 50킬로, 70킬로, 100킬로가 있다, 김미순은 50킬로 코스를 택했다. 제한 시간은 18시간. 그녀가 참가한 2025년에는 47개국에서 2,000여 명이 참가했다.


"중간에 신발 벗는 사람 수두룩해요."


그녀의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다가 건강을 해치면 어떻게 하려고 위험하게 무리하냐고 물었다.


"제가 목숨이 몇 개인가요? 저는 조건이 남들보다 안 좋아서 평소에 더 노력하지요. 훈련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숨이 차 오르면 길가에 눕는다. 숨 넘어가 죽을 것만 같다가도 단 몇 분만 쉬어도, 세포가 번쩍번쩍 일어서고, 몸이 펄펄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일어나 다시 달린다.


"이 맛에 달려요.

vmm-18.3-pp800zat07rv1lkyz8t8t7yp68doszcxxn2ly76ra0.jpg 사파트레일런 사진: VMM

막바지에서 그냥 쉬고 싶었다. 그만 달리고 싶었다. 그녀는 이를 '악마의 유혹'이라고 부른다. 몇 번이고 신발을 벗고 싶었다.


"돈이 얼마나 든 건데 포기해? 비행기 값 들여서 참가비 내고 왔는데, 포기해?"


포기하면 그녀 성격 때문에, 반드시 다시 와야 한다. 실패가 마음에 걸려 놔둘 수 없다. 다시 와서 달리려면 참가비, 비행기값, 호텔비 같은 많은 돈을 다시 써야 한다. 돈 생각나서라도 포기할 수가 없다. 알뜰히 살림하는 그녀의 억척스러움이 더욱 신발을 벗지 못하게 한다.


오 킬로만 더 가자. 오 킬로를 간 뒤에는 다시 오 킬로만 더 가보자. 다시 오 킬로 간 뒤에 이제는 마지막 오 킬로다. 또 오 킬로 가자. 김미순은 마지막 20킬로를 그렇게 넘겼다. '당신은 할 수 있어'라는 남편 김효근의 격려도 큰 힘이 되었다.


"결승선이 백 미터쯤 남았어."


가이드 러너(동반 주자) 남편 김효근이 끈을 당기며 말했다. 김미순은 마지막 힘을 다해서 달렸다. 마침내 결승선에 들어섰다. 팀원들이 몰려와 축하해 주었다. 남편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기록은 15시간 40분. 나중에 들었다. 그녀가 60대 여성 50킬로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나무 기념패도 받았다. 늘 완주를 했지만 이날은 기분이 달랐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 김미순은 소리 질렀다.


"가자! 맥주 쏠게."


팀원들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7명 팀원 중에서 한분은 중간에 신발을 벗었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달리다가 힘들 때는 그런 생각이 든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는 뛰지 않겠다고 마음먹다가도, 결승선을 통과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밤새 너무 힘들었던 게, 눈 녹듯 사라진다. 그리고 궁리한다. '다음엔 어디 가지?' 다신 안 한다고 했다가도 또 뛰게 된다. 중독이다. 약도 없다.


"이 즐거움은 돈으로 살 수없는 거죠, 미치지 않으면 못해요"

2025-VMM-photo_website-rg9oxtisnk1qu6fz9t6voolmi2kmi16zi1enuwx1nc.jpg 사파트레일런 사진:VMM

* 브런치북 <보이지 않아도 보이네> 17화였습니다.

다음 주에도 김미순의 마라톤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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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겪고 나니 보이는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사파.jpg 사파트레일런 야간 달리기 사진:VMM

* 대문사진은 김미순, 김효근 부부 (출처:조선일보 2016.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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