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문
“제발 답 좀 해라, 답장 좀 해” 동창회, 친목회 같은 모임에서 총무나 회장, 연락책 해본 분이라면 누구나 해본 말일게다. 여러 분께 문자 보냈는데 답신이 안 오거나 드물게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체 활동할 때 어려움 중 하나가 연락해도 반응이 없는 것이다. 답 해줄 만한 분이 안 해주면 소심해지기도 한다. 혹시 그동안 실수 한 게 없는지 돌이켜보기도 하고, 받는 분이 뭔 탈이라도 난 건 아닌지 걱정도 든다. 답신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소통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니까.
그러다 보니, 소소한 문자에도 답해 주는 분들이 돋보인다. 별생각 없이 답해 준 분도 있겠지만, 마음이 오간 듯 뿌듯하게 여겨진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한 친구가 들려준 말이다. “나는 바로 답장해 줘. 모임 연락 같은 거 받으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신을 바로 받는 것과 시간이 지난 뒤 받는 것과 느낌이 다르다. 바로 받으면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고맙기까지 하다.
흔히 누구누구의 ‘불통’을 쉽게 비난한다. 나라면 저 자리에서 소통을 잘할 수 있을 텐데 왜 저리도 소통 못하는지, 한심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소통해야 할 대상이 많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음 편한 사람과는 누구나 쉽게 소통하지만, 상대하기 싫은 사람하고는 그리 하기 힘들다. 특히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에 가깝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루가 5:31) 마찬가지로 나와 소통이 필요한 사람은 나와 친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 나와는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오래전 친구끼리 나눈 이야기다. 한 친구가 아내와 오랜 세월 갈등을 겪다가 그만 바람피웠다. 친구는 아내와 세 아들을 두고 집 나가서 살림을 따로 차렸다. 버려진 아내와 아들들의 고통을 애써 피하고, 한동안 잘 살았다. 세월이 흘러 세 아들이 어른이 되었다. 친구가 하소연했다. "이제 와서 아들을 만나려고 하니,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상대해주지 않아."
다른 친구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어릴 때 집 나간 아버지가 아들이 커서 살만해지니까 자꾸만 연락하고 찾아왔다는 거였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모질게 욕을 퍼붓고 내몰기까지 했단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눈물 보이며 다시는 절대 안 찾아오마고 다짐했다. 그때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해마다 몇 번씩 연락하고 찾아왔다. 오랜 세월 그렇게 만나면서 지내다 보니 아들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받아들여야지 했는데 아버지는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식들이 상대하지 않으려 해도 네가 먼저 자꾸 연락해. 무리해서라도 만나봐. 그러다 보면 자식과 가까워질 수 있어. 그게 자식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길이기도 해.”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루가 11:9) 소통의 문을 열려면 문을 두드려야 한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두드리지도 않는데 문 열어줄까. 두드린다고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열어줘야 열린다. 한밤 중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친구가 찾아와 빵을 꾸어 달라고 사정한다면, 우정 때문에 청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귀찮게 졸라대야 빵을 준다. (루가 11:5~9)
루가복음 18장에 '끈질긴 과부 이야기'가 나온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아주 거만한 재판관에게 억울함을 끈질기게 호소하자, 재판관이 결국 손을 들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루가 18:5)” 이어서 같은 18장에 '예리고의 소경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은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고 소리 지른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주님께 청한다.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러 세운다.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 18:42)
“당신의 의견을 반대한다고 상대방에게 적의를 갖지 마십시오, 이해 못 해서 그런 거니까. 백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한경직 목사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한 두 번 노크한다고 누가 바로 문 열어줄까. 귀찮아서 못 들은 척하지 않을까. 더 두드리면, “지나가다 가겠지” 하고 무시할 게다. 계속 더 두드리면, “뭐야 안 가고. 왜 이리 성가시게 굴어” 예민해하다가, 두드리는 소리에 “정말 짜증 나네. 완전 짜증 나” 화를 낼 게다. 그러다가 계속 두드리는 문소리에 질려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아휴, 졌다. 졌어. 열어주고 말자.”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내 문을 계속 두드린다면 생각해 볼일이다. 평소 사이가 불편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살펴 볼일이다. 그동안 불통으로 생긴 문제가 무엇인지, 이제는 소통할 때가 된 건 아닌지. 소통의 문은 밖에서만 여는 게 아니다. 안에서 열어주어야 쉽게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