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의 힘
“저는 물병을 들고 앞장서겠습니다. 제가 깃발을 들고 다니면 여러분이 중국 단체 관광객처럼 보일까 봐서요." 4년 전, 캐나다 단체 관광 따라갔다가 들은 한국 가이드 말이다. TV 드라마 <도깨비> 무대였던 올드 퀘벡의 ‘샤또 프롱트낙 호텔' 앞 광장에 사람이 많으니, 가이드를 잘 보고 놓치지 말고 따라오라고 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자연스럽게 다니는 게 추세라서일까, 이제는 깃발 든 가이드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눈에 띄는 뭔가로 안내해야 할 상황이니까 깃발대신 물병을 들겠다고 한 것이다. 모두 ’와‘하며 재미있어했다.
도깨비 호텔 앞 광장에는 한국인, 중국인, 서양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가이드는 물병을 높이 쳐들고 따라오라고 신호했다. 물병이 깃발만큼 분명하게 눈에 뜨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이드가 자랑스러웠다. "한국 사람은 뭔가 달라." 혼잣말하며, 나도 덩달아 으쓱했다.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관광객을 이끌고 오는 가이드의 손 끝에 눈길이 멎었다. 중남미 사람처럼 보이는 여성 가이드였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작고 가냘픈 몸매의 그녀는 꽃 한 송이를 치켜들고 앞장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만 한 해바라기 꽃을! 순간 물병 든 우리 가이드 모습을 가려주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여러 사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시키려면 시선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말을 잘 전달하려면 상대방의 귀를 집중시켜야 한다. 가르칠 때도 그렇다. 대학강의를 12년째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강의 때마다, 무슨 말로 시작 할까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로 집중시킬까. 웃기는 이야기를 준비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때로는 학생들이 가장 관심 있어하는 학점 이야기를 한다. 학생들이 첫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업에 몰입시킬 수 있다. 일단 학생들이 집중하면, 강의도 술술 풀려 나간다.
라디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송에서 시작하는 말을 오프닝 멘트(Opening Ment)라고 부른다. 오프닝 멘트는 청취자를 끌어들이고, 그 프로그램의 내용을 암시한다. 오프닝은 첫인상을 넘어서 프로그램 전체 인상에 영향 준다. 오프닝이 중요하다 보니까 해당 프로그램 작가 중에서 가장 잘 쓰는 작가에게 오프닝 멘트를 쓰게 한다. 방송사 안에서 프로그램 평가할 때도 오프닝 멘트를 집중적으로 듣는다. 오프닝만 듣고도, 진행자의 능력, 작가의 글 솜씨, 연출하는 사람의 감각을 가늠할 수 있다. 라디오 진행자를 뽑는 오디션에서도 오프닝을 녹음해서 평가하기도 하고, 작가를 선정할 때도 오프닝 원고를 써보게 하기도 한다.
전설의 DJ 이종환의 오프닝은 남달랐다. 30여 년 전, 눈 오는 어느 날, MBC FM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오프닝이다. “지금 눈이 내리네요. 갑자기 눈이 내려서 저는 술 먹다 말고 스튜디오로 달려와 녹음한 걸 지우고 생방송합니다. 눈 오는 날에 이 노래를 여러분께 꼭 들려 드리고 싶어섭니다.” 당시 방송을 들은 전 MBC라디오 PD 신권철의 기억이다. DJ 이종환은 청취자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 뒤 노래를 소개했단다. ”이 노래 음반은 MBC 레코드실에 딱 한 장뿐입니다. 이미자의 노래 '첫눈 내리는 거리' 들려드립니다” 신권철 PD는 혹시나 했다. 일부러 한 장뿐이라고 강조 한 건 아닌지 궁금해서 MBC 레코드실을 샅샅이 뒤졌다. 짐작대로였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 나왔다.
DJ 이종환은 방송을 미리 녹음해 놓고 퇴근했다가도, 갑자기 눈이 내리거나, 큰 사건이 터지면, 지체 없이 방송국에 다시 나타나 새로 녹음하곤 했다. 그러한 열정에다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말솜씨 때문에, 청취자들은 집중해 듣거나, 저도 모르게 볼륨을 높이기도 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를 라디오 후배들은 '방송 10단' , '방송의 천재', '라디오의 전설'이라고 칭송한다.
집중은 이야기를 이어가는데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MBC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 <시선집중>을 진행할 때다. 어떻게 해야 인터뷰를 잘할 수 있냐고 물었다. “좋은 질문 던지는 것 못지않게, 열심히 잘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질문도 나오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는 사회자의 기본 능력의 하나로 집중력을 꼽았다. 그 자신도 인터뷰 마치고 나면 피곤해서 다른 일 하기 싫을 정도로 집중한다고 했다.
1990년 전후,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 PD 할 때였다. 별밤지기 이문세는 방송에 처음 출연하는 사람이건, 딱딱한 교수이건, 연예인이건 누가 출연해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재능이 남달랐다. 그가 진행하면 교양프로그램도 오락 프로그램처럼 재미있었다. 그에게 어떻게 해서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끌고 가냐고 물었다. "대화에 굉장히 집중해요, 집중하다 보면 상대방에서 허점이 나오고, 허점이 나오면 허점을 이용해서 웃기는 거죠, 유머러스하면 유머러스한 대로 받아서 재미있게 하는 거고.” 미리 준비한 질문지 순서대로 묻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집중해서 듣고 질문을 찾아내다 보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끌 방법이 나온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많은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다. 이왕 나누는 이야기도 제대로 하려면 상대방 말에 집중해 주고, 상대방을 나에게 집중시켜야 하지 않을까. 해바라기 꽃을 든 가이드처럼, 방송의 고수들처럼, 집중의 기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