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안에 성모님을 안고 잠든 밤
“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잖아.”
이 말이 왜 이리 거북하게 들릴까. 신앙심이 깊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정작 내 안엔 빈틈이 적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방송사 가톨릭 교우들의 단체인 시그니스코리아 모임의 회장도 지냈고, 국제 가톨릭 커뮤니케이터 단체인 ‘시그니스 SIGNIS’에서 아시아 이사로 9년 동안 봉사도 했다. 그랬기에 나는 종종 신앙의 ‘모범생’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신앙은 흔들리기도 한다.
스무 해 전쯤, 어느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
“신부님, 저는 신앙심이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신부님은 부드럽게 웃으시며 말씀했다.
“신앙은 은총이예요. 기다려보세요.”
그 말을 믿고 지금도 기다리는 중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는 주님께서 제게 은총 내려주시기를.
어느 날, 낙상으로 머리를 다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한국 저시력인협회 미영순 회장이 한 뼘 크기의 루르드 성모님 상을 보내주셨다. 미 회장은 독실한 불자다. 그런데도 가톨릭 신자인 저를 위해, 성모상을 보내주신 거다.
“아프면 서로의 신께 빌어주는 게 종교인의 도리죠.”
그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이 분은 경기여고를 다니다 시력을 잃었고, 그 후 대만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까지 저시력인을 위한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의 헬렌 켈러’로 불릴 만큼 헌신적인 분이다.
미얀마의 어느 성당에서 본 광경이 문득 떠오른다. 성당 옆 작은 공간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고, 한 교우가 그 곁에 누워 쉬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처럼 느꼈다. 우리나라 성당의 경건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지만, 그 모습은 참 따뜻하고 자연스러웠다. 법당에서도 부처님 앞에서 눕거나 벽에 기대 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유롭고, 친근하고, 인간적 느낌이 난다.
불교국가인 미얀마는 놀라운 불교 유적을 품은 나라다. 바간에는 천년 전 건축된 사원과 불탑이 무려 2,500여 개나 남아 있다. 양곤의 슈웨다곤 파고다는 규모나 장엄함에서 유럽 성당 못지않다. 그 불탑을 바라보며, 저는 그 나라 사람들의 신심을 헤아려보았다. 미얀마 불자들은 월급의 30% 이상을 봉헌하기도 한단다. 그 믿음이 힘이 되어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나 보다.
병실에서 성모님 상을 가슴에 안고 잠들어 보았다. 마치 어머니를 안아드린 것처럼, 포근했다. 어머니께서 병상에 누워계시며 내 손을 잡아주셨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손을 꽉 잡아주시면 “힘이 있으시네요” 칭찬했고, 느슨하면 “조금 더 힘주세요” 조르던 그때의 장난스러운 애틋함. 그 손의 온기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성모님 상의 볼을 제 볼에 비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제가 성모님의 볼을 비빈 게 아니라, 성모님께서 제 볼을 어루만져 주신 게 아닐까?”
친구 알로이시오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건 네가 성모님을 안은 게 아니야. 성모님께서 네 품에 들어오신 거야.”
교리로 보자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지만, 성모님께 안겨도 좋지만 안아 드려도 좋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609060166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