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손이 닿을 때, 마음이 살아난다
아플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진짜 회복은 어디서 시작될까.
"가만히 쉬세요."
언뜻 들으면 따뜻한 위로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말이 언제나 위로가 될까?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라고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어려울 때 기껏 도와주었더니 잘못된 길로 빠지는 사람도 있고, 밉다고 잘랐더니 더 잘되는 사람도 있다. 병상에서의 배려도 마찬가지다.
‘외상성 뇌출혈’로 입원하니, 의사는 2차 충격이 더 위험하다고 단단히 주의 주었다. 머리를 다쳤다 해서 그런 걸까. 정작 나 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긴장한다. 간병인은 내가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바짝 따라붙어 겁을 준다.
“넘어지면 큰일 나요!”
딸은 울먹이며 애원한다.
“아빠, 아무 생각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요. 아빠 건강이 나빠지면 우리 가족 모두가 힘들어져요.”
사우회 회장도 재빨리 조치했다.
“당분간 김 편집장 대신 일해주실 유능한 분을 모셨습니다. 사우회보는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전념하세요.”
따뜻한 배려의 말씀이었다. 감사하면서도, 내 가슴 한편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사고를 쳤으니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몸도 예전 같지 않으니, 이제는 깔끔하게 편집장직을 내려놓아야만 될 듯했다.
다음 날 회진 때 주치의에게 물었다.
"제가 편집장을 그만두는 게 나을까요?"
의사는 미소 지었다.
“인지 기능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재활이라는 건 하던 일을 최대한 계속하는 겁니다. 물론 무리해서 아프거나, 치료를 방해할 정도면 멈추어야겠지만, 굳이 안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
친구인 의사도 비슷하게 말했다.
“재활이란 게 영어로 rehabilitation이에요. 이 단어의 의미대로 원래 적합했던 삶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하던 일은 계속하셔야 돼요. ”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예순이 넘어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성당활동에 열심이었다. 서울 변두리에 살 때는 성당 자매들이 어머니를 잘 챙겨주어서, 반모임이나 연령회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모임 나가는 어머니 얼굴은 언제나 환했다.
집안 형편이 나아져 신도시 넓은 평수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연령회 버스 타고 장지로 가는 날, 좌석이 부족하면 어머니는 항상 밀려났다.
“할머니는 위험하니까, 집에서 쉬시면서 기도해 주세요.”
하루는 성당에서 화장실 청소 봉사자를 모집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걸레랑 빗자루를 양동이에 담아 들고 성당으로 내달렸다. 그런 어머니가 기가 죽어 돌아오셨다. 그날도 친절한 자매들이 “할머니는 집에서 쉬세요” 하며 말렸단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성당 봉사에 나가지 않으셨다. “이젠 자식들을 위해 집에서만 봉사해야겠다” 하시며 집안일을 돌보셨다.
그날 이후 성당의 문턱이 어머니에게는 담장이 되었다.
병상에 누워보니, 보호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겠다. 몸은 쉬어야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보다 '함께하자'는 말이 더 힘이 된다. 진짜 배려는 몸만 위한 게 아니라 마음도 위한 것이다. 속마음을 읽어주는 게 진짜 배려다.
손을 잡는다고 마음이 잡히는 건 아니다.
차가운 손이 닿으면 마음은 닫히고,
따뜻한 손이 닿으면 마음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