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두 얼굴
죽음의 문턱에서 바라본 삶은 어떤 얼굴일까.
"당신, 나이를 생각해. 뛰어다니지 말고 살살 움직여요. 내 말 듣는 게 당신 사는 길이야."
봄바람이 살랑이던 어느 날, 아내가 건넨 말이다. 젊은 짓 좀 할 때마다 날갯죽지를 꺾는소리해 대서 나는 씩씩대곤 했다.
“내가 무슨 어린애야. 쪼잔하긴…”
그런데, 그 예언 같은 잔소리가 이번엔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요즘 나는 MBC 퇴직사우 모임인 ‘MBC사우회’ 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다. 늘, 취재거리를 찾아 기웃거린다. 라디오 PD 할 때, 라디오다큐멘터리 만드느라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뒤졌다. 탄광 막장도 기어들어갔고, 벌목현장을 찾아 깊은 산속을 헤맸고, 멸치잡이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녹음기 한대 달랑 둘러메고 낙도나 오지를 싸돌아다닌 버릇이 있었기에 가볍게 길에 나섰다.
“나는 복도 많아. 이 나이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돌아다니잖아.”
큰소리 빵빵 내지르고 싶은 즐거운 기세로 용산역에서 계룡대 가는 새마을호에 올랐다. 차창에 기대 차창풍경을 즐기며, 복에 겨운 내 인생을 감사하고 감사했다.
15년 전에 여수 MBC 사장을 지낸 송원근 사우의 농장이 있는 논산 인근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전에 그가 “해마다 500그루씩 나무를 심어요.”라고 말한 게 떠올라, 인생 2막을 취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오는 걸 말렸다.
“요즘, 농촌에서 나무 심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건비도 올랐고, 일손 구하기도 힘들어.”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못 알아들은 척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송 사장 농장은 부드러운 산자락에 기대어 펼쳐져 있었다. 어느 지관이 <금계포란형>이라고 했단다. 닭이 양 날개를 펼쳐 알을 품은 듯 포근하다. 그는 고구마를 쪄 내와서는, 아버지와 함께 고향에 나무 심고 도서관 세우려던 꿈을 들려주었다.
“땅이 없었죠. 조각조각 사 모았어요. 그러다 2000년 초에 10 만평 넓이의 그럴듯한 땅이 매물로 나왔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승부수를 두었어요. 서울 아파트와 부동산 모두를 팔았고, 65세 시던 아버님도 마음 단단히 잡숫고 전 재산을 처분해서 그 물건을 잡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란 고향 땅. 그 아들과 손자가 다시 뿌리내리기 시작한 곳. 그 이름도 손주의 이름에서 따온 ‘송국농원’. 지금 이곳에는 한밭대학 교수를 지낸 아버지 송영준 , 큰아들 송원근, 원주 MBC 사장이었던 동생 송형근 3 부자의 책, 3만여 권이 별채 거실과 5개의 컨테이너 박스에 그득 쌓여 있다.
함께 농원을 걸었다. 아버지와 같이 심었다는 홍매, 백매, 청매 줄기는 아기 손목만큼 굵게 자랐다. 소나무 아래서 달을 바라보는 자리, ‘송하간월대松下看月臺’에 이르자, 송사장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힌다.
“여기서 달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
부자의 애틋한 사연에 내 마음도 먹먹했다. 고인이 심은 나무 한그루, 한그루 살피며 비탈길을 올랐다.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고 느낀 순간, 내디딘 발이 허공을 밟았다. 그대로 굴렀다. 내 기억은 거기서 뚝 끊겼다.
훗날 들은 이야기다. 송사잠이 뒤돌아보니. 내가 쓰러져 기절한 채 코와 귀로 피를 흘리고 있었단다. 재빨리 119를 불렀다. 경찰에 신고하고는 호흡이 흐려진 나를 살리려 인공호흡을 시켰다고 했다. 119 대원 8 명이 에워싸 들것에 실어 응급차에 태웠다. 인근 병원에서 CT 찍으니 '외상성 뇌출혈'!
서울로 급송하는 도중, 엠뷸런스 바퀴가 터졌다. 차량을 교체하고 가족들 애간장 다 태운 뒤에야, 5시간 만에 여의도성모병원에 다다랐다. 다행히 두개골 개두술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기억은 통째로 사라졌다. 눈동자 반응을 체크하고 감각과 운동 기능 확인 검사가 이어졌다.
주치의는 경고했다.
"재활 과정에서 더 큰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적어도 한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하고 석 달은 조심해야 합니다."
뇌에서 인지기능을 맡은 부위가 손상되었다며 인지활동을 권했다. 글쓰기도 좋다고 해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아내와 딸은 요 며칠 나 때문에 울면서 다녔다면서 재발 가만히 있으란다. 여동생도 내가 글 끄적일 때마다 울부짖는다. 꼼짝 말라는 거다. 더 나빠질까 봐 겁나나 보다.
아프니까 보이는 게 있다. 환자복 차림의 내 사진 놓고도 누구는 안심했다는데, 누구는 가슴 아파했다니 눈물과 웃음이 하나의 두 얼굴 아닐까. 죽음과 삶도 그렇지 않을까.
위급했던 순간이 지나면서 가족의 사랑을 새삼 절절히 느꼈다. 지인들 중에는 내 안부를 듣고 눈물 흘리며 지인들에게 기도 부탁까지 한 분도 있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걸. 살면서 가볍게 넘긴 관계들,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죽음이 스치자 삶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은 하나다.
같은 길 위에서 누군가는 넘어지고,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뿐이다.
삶이 흐려지면 죽음이 짙어지고
죽음이 걷히니 삶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