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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다시 쓰는 인생

누우니 보이는 것들

by 김승월
멈춘 순간, 세상이 멈춘 게 아니라 내 안의 이야기가 깨어났습니다.



기억의 끝


두 눈에 플래시 불빛이 번쩍였다. 눈을 떴다. 천장은 낯설고, 불빛은 희미했다. 바쁘게 오가는 발소리,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 들어보세요."

"팔을 올려보세요.”

몸의 반응을 확인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중환자실이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 내 몸이 심각하게 다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엉덩이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뭣 하는 겁니까?"

"욕창이 생길까 봐, 알코올로 닦고 있어요."

간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욕창이라니. 그럼 내가 욕창이 생길 정도로 오래 누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기억의 마지막은 충청남도 논산 ‘송국농원’. 퇴직 사우들의 삶을 소개하는 사우회보 취재 중이었다. 여수 MBC 사장을 지낸 송원근 사우와 농장 야산을 함께 걸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다음은 남들이 들려준 이야기다. 낙엽더미에 미끄러져 비탈길에 쓰러졌단다. 의식을 잃은 채, 코와 귀로 피를 흘리던 나를 송 사장이 인공호흡으로 살렸다고 했다. 119 구조대가 논산 백제병원으로 급히 옮겼고, CT 촬영 결과는 '외상성 뇌출혈'. 곧바로 여의도성모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되어 집중 치료를 받았다.


어둠 속의 작은 불빛


42일을 병상에서 보냈다. 여섯 명이 머무는 병실 한 켠, 커튼으로 가려진 좁은 공간에서 간병인과 지냈다. 저녁을 마치면 잠을 청했고 새벽 두세 시쯤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스마트폰을 켰고 그 생각을 글에 담았다.


그 글을 브런치에 올리고, 지인들에게 나누었다. 글을 두세 편 보냈을 때, 의사 친구인 크리스의 문자가 왔다.

“탤런트를 살리셨네요. 병상일지를 써보세요. 병상에 있는 분들이나, 나이 든 분들에게 위로가 될 거예요.”

병상일지라는 말에 내가 병상에 있음을 실감했다. 그럼 나도 병상일지를 써볼까.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이전보다 글이 깊어졌네요.”

"책으로 내보세요."

지인 몇몇이 추켜세웠다. 부추김에 휘둘린 걸까. 쓰고 또 쓰게 되었다. 하루 한 편, 잘 써질 땐 두 편도 썼다. 쓰면 쓸수록 또 다른 이야기가 샘솟았다. 말로는 하지 못했을 감정들이 글 속에서 흘러내렸다.


떠오르는 삶의 기억들


오래된 기억들도 떠올랐다. 9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 그 어머니를 따라 급작스레 먼저 간 형, 그리고 고단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가족들. 병상에 누워 있으니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 이야기 속에 스며들었다.


여동생이 정색하며 말렸다.
“오빠는 병상일지 쓸 자격이 없어요. 그렇게 심각한 환자도 아니고, 특이한 병을 앓는 것도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위중한 환자는 아니다. 스마트폰 자판을 눌러 글도 쓸 수 있다. 오빠가 우울해질까 봐 한 말이겠지만, 그 말에 주춤했다. 하지만 나 나름의 아픔과 고비를 겪었고, 새롭게 느낀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 이야기들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친구 이야기도 담았다. 그 글을 친구에게 보내고, 함께 웃고 울었다. 글을 쓰고, 읽고, 고치고, 또 지인들의 피드백을 받으니 함께 쓰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글이 쌓일수록, 내 지난 세월이 살아났다.


누웠기에 비로소 보인 것들


그동안 미뤄두었던 삶의 숙제를 푼 기분이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고, 오늘의 나를 살펴보았다.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도 했다. 병실에서 만난 중증 환우들을 보니 손 하나 드는 것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 신비로움 때문일까. 당연하게 여겼던 내 삶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누우니까 비로소 보게 되었다.


삶이 멈추니, 세월이 선명해졌다.

새로 바라본 삶의 민낯과 잊고 살던 흔적들이 한 줄, 한 줄 다가왔다.

멈춘 줄 알았던 샘물은 누운 자리에서 다시 흐르고 있었다.


병상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김승월 (사진: 이우미)


브런치북 《병상에 누우니 보이네 ― 지나가고 나니 보이는 것들》,

다음 이야기는 삶의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깨달음입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은 같은 길이더라”도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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