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핌'과 '참견' 사이

세상의 모든 '엄마'와 '자식'이 평안하기를

by 김작가

학생들이 전면 등교하는 날이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종종 보인다. 오랜만의 등교라 학교 앞까지 함께 걸어가는 엄마인가 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발생하고 내가 사는 동네의 초등학생들은 일주일에 2~3일 정도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들었다. 코로나19 백신 전국 완전 접종률이 78.9%(2021년 11월 21일 기준)인 상황에서 학생들이 학교에 간다.


내가 아침부터 ‘엄마 역할’에 마음이 상해서인지 아이와 함께 걸어가는 엄마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살피기가 참견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아이한테 참견하고 잔소리해서 분위기가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엄마’라는 이름의 내가, 잘 관찰하고 내려놓아야 할 숙제다.


올해 초에 집에서 독립하여 혼자 살고 있는 딸이 주말에 집에 왔었다.

“기운 없어, 자꾸 잠에 빠지고 옆구리가 아파.” 등등의 불편을 호소하는 딸에게 잘 챙겨 먹고 운동하라는 말이 나의 레퍼토리다. 할 수 있으면 영양가 있는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오버한다 싶으면 싫다고 말하는 딸이기 때문에 필요한 게 있는지 무엇을 가져갈지 일일이 물어보고 먹을거리를 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뒀었다.


아침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딸이 싸 달라고 해서 챙겨둔 반찬이 그대로 있다. 그걸 보는 순간 마음이 상했다. 딸은 자기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딸이 가져가지 않은 반찬 앞에서 내 마음이 상하는 이유를 들여다본다.


나는 요리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요리는 몸이 피곤하다. 그런데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식당이나 반찬가게 음식을 어쩌다 한 번은 몰라도 반복적으로 먹기 싫어해서다. 내가 요리한 음식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고 먹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대충 때우는 음식도 싫다. 한마디로 말해서 입이 짧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내 몸에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서 육류를 자주 먹지만 맛있지 않다. 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서 불편하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집 식탁에 고기 요리가 많다. 예전보다 반찬 만드는 횟수를 줄이는 대신 고기를 섞은 일품요리를 자주 먹는다.


독립한 딸이 집에 올 때는 먹거리를 더 신경 쓰게 된다. 딸이 자취하며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것 같아서 집에 왔을 때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먹거리를 싸주고 싶다. 이런 마음으로 딸이 집에 올 때면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본다. 딸이 좋아하는 과일과 채소, 고기를 산다.


딸은 내가 준비한 것 중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챙긴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정확하게 의사 표현하는 딸이 잘 컸다며 감사하지만 때로는 서운할 때도 있다. 딸을 챙겨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거부당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 감정을 잘 들여다보면 내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챙겨야 한다'는 역할에 함몰되어 있다. 내 생각대로 챙기려다가 참견이 된다. 사랑으로 엄마와 자식이 연결된 느낌이 아니라 내가 ‘엄마’니까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자식이 엄마에게 받고 싶은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지 못하고 ‘엄마가 줘야 하는 의무적 사랑’에 빠져서 혼자 마음 상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자식’에게서 독립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딸은 나의 적극적인 보살핌 속에서 살아야 했던 갓난아기도 아니고 지켜보고 기다려야 하던 사춘기도 아니다. 딸과 나는 음식 취향도 다르다. 딸은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식당에 가서 먹기도 하고 배달해서 먹기도 한다. 딸이 깜박하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챙겨가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가지 않아도 잘 지낸다. 끝내는 내가 ‘엄마 역할’에 빠져서 챙기려다 마음 상했을 뿐이다.


‘엄마’가 ‘자식’에게서 독립할 때 ‘보살피기’인지 ‘참견’인지 많이 헷갈린다. 내 경험상 ‘자식’이 요청해서 뭔가 해줄 때는 ‘보살피기’가 되고 ‘엄마’가 보기에 필요해서 챙기려고 할 때는 ‘참견’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음식으로 딸을 참견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딸이 가져가지 않은 음식은 내가 먹으면 된다. 다음에 딸이 올 때는 맛있는 거 요리해서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놔야겠다. 입이 짧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고, 내 몸을 어떻게 보살펴서 건강한 일상을 살아갈지 생각해야겠다. 딸은 음식을 준비하며 피곤해하는 엄마보다 행복하고 건강한 엄마와 있고 싶을 거다.


거실 창문 너머로 초등학생과 함께 갔던 엄마가 보인다. 이번에는 두 엄마가 팔짱을 끼고 걷는다. ‘엄마 역할’ 때문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갔었나 보다. 저 ‘엄마’들은 나처럼 ‘자식’과의 독립에 우왕좌왕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 세상의 모든 ‘엄마’와 ‘자식’이 평안하면 좋겠다.


‘엄마 역할’에 빠진 나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잠시 한쪽 면만 쳐다봤는데 다른 쪽 면이 보인다. 나는 딸에게서 독립하는 중이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다. 구름이 끼어 있다.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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