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해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고통”이다.
어떤 내담자는 상담에서 엄마 때문에 더 이상 울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울었다.
그러면서 엄마에 대한 원망을 쏟아붓고 나간다.
상담을 얼마나 받으면 이 고통이 끝날 것인지 묻기도 한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려 하지만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상담을 계속 받아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고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부정적인 것, 어둠, 나쁜 것들을 모아서 불태우면 고통이 사라지는가?
모아서 폐기 처분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다른 불편이 다시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
내가 우연인 듯 필연으로 공부한 불교상담 공부는 고통에 대해, 고통을 해소에 대해 말한다.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힘을 줘서 외치지 않고 부드럽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다.
고통을 애써 피하지도,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이 고통이 오면 고통을 마주한다.
그러면 고통이 뿌리박지 않고 바람처럼 흩어진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너무 심플해서 공부를 하면서 멍해졌다.
고통이 너무도 질겨서 해결 방법도 아주 대단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복잡한 절차와 희귀한, 비법이 아니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전투태세를 해도 고통은 우리를 뚫고 나갈 것이란 두려움에 온몸의 감각이 날이 선 채로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미리 막으려고 눈을 부릅뜰수록 더 고통스러웠다.
정말 고통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싶은 사람은 행복과 기쁨이 다가오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 오는지 안 오는지 오로지 고통만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을 기다리다 보면 고통을 만나게 되고 역시 고통스러워진다.
그가 원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아이러니를 내담자에게 전달하면 어떤 내담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해요.”
최선이란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런 경험이 거의 없어서 가늠이 안 되기도 하고 만약 행복을 느끼더라도 더 불안할 것 같다고 말한다.
행복을 맛보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행복이 사라지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서 애초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최선은 더 큰 고통을 줄 가능성으로 생각되니 고통을 막는 차선을 선택하게 된다는 의미다.
파국을 막기 위해 고통이 오는지 365일 보초를 선다.
그 결과 작은 불편감에게 쉽게 놀라고 상처를 받는다.
불편감, 부정적 감정, 자연재해, 돌발 사고, 실패, 실수 등 고통을 느낄 만한 모든 것에 매우 예민해진다.
고통의 끄나풀처럼 느껴지는 모든 것을 통제하느라 몸과 마음의 힘은 소모된다.
소모된 뒤 더 이상 고통을 막지 못할까 봐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린다.
몸 마음의 힘을 쥐어짜서, 갈아 넣어서 고통에게 도망치지만 고통은 올무처럼 발목을 잡아챈다.
온라인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뒤편이나 골목을 유령처럼 떠돈다.
고통에 사로잡힌 스크루지가 되어 세상을 떠나지 못한다.
“행복을 바라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고통스러우니 억울해요.”
행복을 바라지 않았으면 고통이라도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최종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가 붙는 문장이다.
차라리 고통이라도 없어야지 라는 뜻이다.
정말 원하는 것은 안정과 행복인데 상처받을까 행복을 포기하고 “차라리” 고통이라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언제 행복할 수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바로 행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쌓여 있는 고통을 해소해야 한다.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도 긍정적인 것도 평가 없이 그대로 허용한다.
고통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어쩌면 고통에서 도망가는 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행복도 고통도 영원한 것은 없는데 붙잡고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내담자에게 고통과 행복은 파도타기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이란 파도도 타고 행복이란 파도를 탈뿐 파도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파도가 오면 파도를 타면 된다.
붙잡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적 차원에서 알게 되면 날뛰는 마음은 조금 가라앉는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고 했다는 것과 집착의 원인이 유년의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정서적 차원에서 알게 되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습관적으로 고통을 회피했던 것도 깨닫게 되고 그런 자신을 그대로 이해하게 되면 고통은 더 이상 머물지 못한다. 파도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흩어진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 마음을 온전히 알면 된다.
평가나 비난 없이 고통과 회피, 행복 등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빅뱅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