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는 새해 단골 다짐이다.
새해가 되면 12달이 있으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연말이 되면 많은 시간처럼 느껴졌던 12달은 환상처럼 사라진다.
많은 시간들은 어디로 갔나?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연말에 도착한 거다.
애초에 살이 찌지 않았다면 뺄 일도 없었을 텐데 살은 왜 찔까?
살과 다이어트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다이어트 정보는 차고 넘친다.
심리역동에서 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랑을 느낄 때와 가장 흡사한 것이 음식을 먹을 때 느낌이라고 한다.
사랑과 음식을 연결해 주는 끈은 엄마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떤 자극도 애씀도 없다.
탯줄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기 때문에 스스로 호흡하지 않아도 된다.
양수에 둥둥 떠 있고 온도도 항상 일정하다.
큰소리도 없고 눈부심도 없고 모서리에 부딪히는 일도 없다.
안락함 그 자체다.
그러다 세상에 나와야 할 때가 되면 고통은 시작된다.
출생 과정 자체가 고통이다.
양수는 줄어들고 자궁의 압박을 느끼며 산도에 끼어서 힘겹게 밀려나게 된다.
딱딱한 사물에 닿고 알 수 없는 여러 소리들과 눈부심과 만난다.
무엇보다 숨을 쉬어야 한다.
최초의 숨을 쉬노라면 코로 들어간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 쪼그라든 폐가 펴진다.
폐가 펴질 때 통증을 울음으로 토한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완전한 안락함에서 예고와 예상 없이 출생이란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겪는 최초 트라우마다.
충격을 받은 아기는 엄마 품에서 겨우 진정한다.
뱃속에서 들었던 가장 익숙한 소리인 엄마 심장 소리를 듣고 조금씩 진정이 된다.
세상에 나온 아기가 엄마와 가장 가깝게 있는 순간은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줄 때다.
젖을 먹는 아기는 엄마의 체온과 부드러운 피부, 익숙한 심장소리, 포만감을 느끼며 과거 파라다이스를 경험한다.
엄마가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은 돌봄이며 사랑이다.
원초적 사랑이다.
하나가 되는, 파라다이스를 되찾는 것이다.
사랑과 음식을 먹는 것이 비슷한 이유다.
나약한 아기가 살려면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은 관심이고 관심은 사랑이며 사랑은 생존이다.
사랑이 부족하면 채우려고 하는데 사랑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사랑에 매달리게 되는데 사랑을 얻지 못하면 대체물로 음식을 찾는다.
사랑은 핑크빛 하트가 아니다.
세상의 사랑은 거친 투쟁으로 얻는 생존이다.
아기가 엄마 품에서 과거 파라다이스를 얻는 방법이 젖을 먹는 것인데 “젖 먹던 힘”이란 말처럼 모든 힘을 동원해야 된다.
아기가 엄마 젖을 먹고 나면 애를 써서 흠뻑 땀을 흘린다.
그렇다면 살이 찐 사람들은 애정결핍인가?
애정이 부족해서 음식을 탐닉한 결과로 살이 쪘나?
많이 먹어서만 살이 찌는 것은 아니다.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아도 호르몬 문제로도 살이 찐다.
대사질환이라고 부르는 상태인데 몸 전체 리듬이 헝클어지면 많이 먹지 않아도 살이 찔 수 있다.
물론 많이 먹어도 살이 찐다.
음식물이 몸 안에서 칼로리로 쌓이나 소모되지 못하면 살이 찐다.
소모가 되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도 모르게 소모를 막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부족하다, 받지 못했다, 힘들다, 외롭다, 고통스럽다.’고 느끼면 몸은 방어하려고 한다.
심리적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과거 파라다이스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 파라다이스는 출생 후 그대로 경험하기 어렵다.
가장 유사한 것이 부모 사랑, 커플(연인, 부부)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애착과 죄책감, 열등감을 동시에 갖는다고 한다.
이런 양가적 감정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오이디푸스적 엄마에 대한 사랑을 지속함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불편한, 고통스러운 감정을 대상에게 투사하고 대상을 평가절하하며 미워한다.
대상뿐 아니라 개인 내면에서 자신에 대한 양가감정을 소화하기 어려울 때 역투사가 일어날 수 있다.
죄책감, 열등감의 부정적 감정이 공격성을 띠며 대상에게 투사될 때 발생하는 갈등이 두려우면 역투사가 가속된다.
내부에서 에너지 측면에서 소모를 최소화하며 동시에 자책할 때 고통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갇혀버린다.
들어오는 음식이 적어도 몸은 유사 전쟁 상태이기 때문에 소모를 극도로 줄이게 된다.
한마디로 몸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내부의 내전은 자체로 공격성이다.
사랑은 생존을 의미하는데 생존하기 위해 먹은 음식을 살기 위해 소모를 늦출 때 아이러니하게 공격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살은 사랑의 변이 된 버전이다.
대상이나 자신을 향한 공격성은 사랑의 단짝이다.
낮과 밤이 하루를 이루듯이 사랑과 공격성은 하나를 이룬다.
공격성을 분리해서 버리려 할 때 무너진다.
무조건 살을 빼면 된다는 식은 저항을 불러온다.
살이 쪘느냐가 핵심이 아닌 것이다.
때로 지나치게 마른 것 역시 애정결핍 상태이다.
살과 공격성을 나쁘다고 몰아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면 극단에서 평안으로 갈 수 있다.
상담적 표현으로는 사랑과 공격성의 통합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다이어트를 하려고 하는가?
내 몸이 자연스러운 소모를 멈춘 이유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올해는 무작정, 다짜고짜 하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먼저 귀 기울이는 다이어트를 하자.
사랑이 부족해서 살이 찌거나 마르는 극단에서 벗어나 적절한, 이만하면 좋은 상태에 이르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