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티즈는 참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 자두도 참지 않는다.
7살이 넘으니 던져준 장난감을 물어온다.
얼마나 기특한지!
다른 종 개를 키우는 사람은 던져준 장난감은 당연히 물어오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나 예외가 있듯 자두는 다르다.
자두는 아침에 일어나서 배변판에 볼일을 보면 짖는다.
칭찬하거나 간식을 달라고 한다.
배변 훈련 때 기억이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5살 무렵 아파서 입원했을 때 오줌조차 못 눠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잘 때 안아달라, 무릎에 앉혀달라 조른다.
위층에서 하울링 소리가 들리면 베란다로 달려가 어설프게 하울링을 따라 하고 칭찬해 달라고 쳐다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상태인 자두는 극히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
아주 순수한 상태다.
단순한 마음과 단순한 삶을 사는 자두를 보면 대리만족이 되나 싶다.
자두보다 복잡한 마음과 삶을 사는 나는 그래서 생각이 많다.
때로 생각을 꺼버리고 싶다.
전등처럼 생각에 스위치가 있다면 켰다가 껐다 마음대로 선택하고 싶다.
그런데 생각은 숨 쉬듯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작동한다.
과거 생각, 현재 생각, 미래 생각.
과거 생각은 주로 이불 킥을 부르는데 후회, 짜증, 분노, 슬픔을 일으킨다.
욕실 수챗구멍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처럼 과거 생각은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해.’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랬나?’
‘그곳을 나왔어야 했어.’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야.’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몸은 현재를 살지만 마음은 상처받은 과거를 헤맨다.
그러다가 문득 현재를 현타처럼 자각하고 나면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회, 짜증, 분노에 불안이 더해진다.
부정적 감정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조차 끝장이 난 것 같다.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서 가라앉으면서 읊조린다.
“이번 생은 망했어.”
망한 생을 살아가는 것은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미 없는 칼로리가 쌓일 뿐이다.
좀 더 맛을 내기 위해서 후추를 뿌려본다.
파를 올려보기도 하고 참기름을 살짝 넣는다.
결과적으로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이상한 음식이 된다.
맛있게 먹는 옆 사람이 있어 조언을 구한다.
그 사람은 생기 가득한 눈으로 입맛을 다시며 알려준다.
신선한 재료가 필요하고 레시피에 충실하게 조리가 되어야 한다고.
세상이란 식당에는 삶이란 다양한 음식들이 있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맛을 내기 위해 열심히 배운다고.
네 음식이 맛이 없다면, 망한 음식 같다면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살펴보고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노력을 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법이며 갈고닦아야 한다고.
마치 자기 계발서에서 나올법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래서, 가뜩이나 맛없는 음식을 먹는데 식욕이 더 떨어진다.
옆 사람은 의기양양 살아가는데 나는 망했구나.
답이 없구나.
우울하고 무기력을 본 옆 사람은 한층 맞는 말을 해댄다.
우리 사회는 학벌사회라서 좋은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받는다.
투자를 해서든 유산을 받든 금수저로 살아야 하며 서울 어느 곳에 입성해야 한다.
돈이 돈을 벌 것이다.
24시간 잠자는 시간도 쪼개서 부서져라 일을 해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구구절절 옳은 말들, 차가운 현실 조각이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욕이 올라온다.
너무 맞는 말만 해서 속이 울렁거린다.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다.
옳은 말을 들을수록 화가 치민다.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마음이 원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위로였다.
괜찮냐는 말이었다.
괜찮니?
속상했겠구나.
슬펐겠구나.
힘들었겠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팩트 확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엉켜있어서 팩트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이 진짜인지 알 길이 없다.
이번 생이 망한 것 같은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
부정적 감정에 묻혀 있어 현재 삶이 보이지 않기에 구분할 수 없다.
우선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정신을 맑게 돌려준다.
겉으로는 팩트이고 맞는 말이며 정답인 것 같지만 마음속에서 진동하지 못하는 말들은 훌륭한 개소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