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센터에 오는 사람 중 많은 분들은 상담에서 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
혼자 애써도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에서 답을 구하길 원한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심리상담은 해결해 주거나 답을 주거나 조언하지 않는다.
이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할 답을 알고 있다.
답을 몰라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문제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잘못된 확신 때문이다.
또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이런 마음은 의식 차원이 아니다.
의식 차원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어떤 대상에게 화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상처 준 대상에게 원망이 남아 있는데 문제가 해결되면 원망을 못한다는 억울함이 있다.
이 말은 문제 해결이 아닌 원망이 우선인 것이다.
문제로 고통받아도 차라리 고통을 받을지언정 원망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상담에서는 이런 양가적 마음을 내담자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 마음은 단순하지 않고 층층이 복잡하다.
프로이트는 복잡한 사람 마음을 이해하려고 지형적 개념으로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라 이름을 붙였다.
각각 영역이 마음에서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지형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다.
물에 잠긴 빙산 그림으로 표현되는데 물 위로 솟아난 작은 빙하 부분을 의식이라 하고 물아래 잠겨 있는 커다란 빙산을 무의식이라 볼 수 있다.
전의식은 깊은 물아래가 아니라 물아래 가까운 영역을 의미하며 쉽게 물 위로 올라올 수 있는 부분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나도 모르게, 원하지 않았는데 어떤 일이 생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무의식의 영향이다.
바로는 생각나지 않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유를 알게 된다면 전의식이다.
상담 장면에서 심리 탐색할 때 주로 전의식이 드러난다.
전의식은 무의식의 일부이면서 의식으로 올라와 마음을 알게 도와준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대부분 의식을 하면서 산다고 여기지만 사실 무의식이 훨씬 크고 강하다.
의식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의식하고 산다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확신은 완벽하기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덜 상처받는다.
마음의 여지를 갖는 것은 좋은 예방이 된다.
앞에 말한 것처럼 상담센터에 와서 문제의 답만 알면 고통이 해결될 것 같지만 무의식에 있는 원망과 미움이 핵심이다.
문제라고 의식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서 고통을 대변할 수 없다.
복잡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바꿔 말하면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온전히 깨닫는 것이 된다.
머리로 깨닫는 것은 의식 부분이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무의식에 가깝다.
둘 다 도움이 되지만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머리로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깨닫는 것보다 쉽다.
대부분은 머리로 먼저 깨닫고 그다음 마음의 깨달음으로 간다.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평생이 걸려서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의 마음을 알고자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을 안다,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을 우주에 비유할 정도로 사이즈가 크다.
인간이 우주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도 비슷하다.
끝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프로이트는 의식, 전의식, 무의식과 구조적으로 초자아, 자아, 원초아로 설명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은 종종 “자아”를 언급한다.
“자아가 약해서 문제예요.”
“강한 자아를 갖고 싶어요.”
간혹 멘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MMPI-2 보충척도에 Es(Ego Strength)는 자아 강도 척도 또는 스트레스 내성 척도라 부른다.
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다 보니 자아가 심장, 폐, 간처럼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낀다.
열심히 노력하면 자아가 단단한 근육질이 될 것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심리검사 척도에도 있고 사람들이 자아를 언급하지만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없다고 하면 대부분은 난처해한다.
약한 자아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자아가 없다면 말이 되나?
자아는 물리적 형태를 갖고 있지 않고 마음의 조절하는 기능을 자아라고 부른 것이다.
윤리, 도덕과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언행 하고 싶은 원초적 욕구(원초아)와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외부의 명령이 마음에서 작동(초자아)할 때 두 마음은 격돌한다.
이때 두 마음을 조절하는 기능을 자아라고 명명한다.
원초아, 자아, 초자아 모두 마음의 특성일 뿐이다.
강한 자아란 조절 능력이 좋은 것이며 균형을 잘 잡는다는 것은 유연하다는 것이다.
강한 자아는 단단한 정도가 아닌 유연성이 뛰어날 때다.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면서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유연한 것이다.
유연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떤 극단에서도 치우침이 없다.
너무 기쁘지도 너무 슬프거나 힘들지 않다.
긍정적 감정도 부정적 감정도 붙잡지 않는다.
핵심은 균형에 있기 때문이다.
자아라고 이름 붙인 마음의 기능을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 조급함과 집착을 불러온다.
긍정적인 감정만 붙잡고 부정적 감정은 막고 싶어진다.
빨리 자아를 강하게 해야만 부정적 감정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아를 강하게 만든 것은 곧 자신이 강해지는 것 같이 느낀다.
강하면 고통을 막거나 없앨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진다.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순간 고통은 일어난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니 고통은 배가 된다.
고통을 느낄 때 자아가, 자신이 약한 것이 원인이라 생각해 더욱 자신에게, 좋다고 여기는 것에 집착한다.
자신은, 자아라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할 때 불안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고통을 겪을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과학자처럼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게 스스로 자신을 고통에 묶어놓는 선택을 하게 된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인지 따져보기 전에 강한 자아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