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인데 한여름 같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습하고 덥다.
학창 시절에 여름은 여름방학이 떠오르고 어른이 된 뒤 여름은 여름휴가가 떠오른다.
여름방학은 그저 좋았다.
겨울방학도 있지만 방학이라고 하면 단연 여름방학이었다.
길기도 했고 물놀이(거의 해본 적이 없지만), 체험(역시 거의 해본 적이 없다.) 등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여름방학은 2주가 좀 넘는다고 한다.
여름방학보다 길어진 겨울방학이 방학 같은 느낌이다.
내 어린 시절 여름방학은 부모가 늘 일만 했기 때문에, 또 내 부모 삶에는 “논다,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여름방학에 대한 설렘은 바다와 초록색과 자유롭게 부는 바람이었지만 현실은 일기와 그림 그리기, 왜 하는지도 모르는 곤충 채집으로 이뤄졌다.
여름방학은 할 일도 없으면서 일찍 눈이 떠졌다.
할 일, 학교 갈 일이 없어서 일찍 일어나게 되는데 그 여유가 좋았다.
내게 여름방학은 무료함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한옥에서 살았는데 더운 여름 어느 날 마당 수돗가 물이 가득한 빨간 고무대야에서 고양이가 수영을 했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고 알았는데 너무 더웠는지 스스로 물에 들어갔다.
아빠와 엄마는 가게에 나가고 청소년이었던 언니와 오빠는 어디 갔는지 모르고 나만 혼자 집에 남아 현기증이 나도록 더운 한여름 낮에 마루에 앉아 고양이가 수영하는 것을 바라봤다.
여름방학을 떠올리면 시간이 정지된 듯한 몽롱한 그 시간이 생각난다.
재미도 없는데 여름이 되면 루틴처럼 방학을 기다렸다.
어른이 되니 여름휴가는 여름방학과 비슷하다.
여름이 되면 여름휴가를 떠올리지만, 정작 쉬지 못하는 것 같다.
쉬고 싶지만 쉬지 못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 여름휴가를 여름방학처럼 맞이하면서 의문이 들었다.
왜 쉬지 못할까?
왜 모두 비슷한 기간에 휴가를 떠나는 것일까?
여름휴가는 꼭 쉬어야 하나?
여름휴가에 무엇을 해야 하나?
결혼을 하니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여름휴가는 치러야 하는 과업처럼 느껴졌다.
다른 가족들처럼 여름휴가에 바다를 가야 할 것 같고 캠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적지를 가고 뭔가 감상과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았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여름휴가를 치러낼 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사 치르는 것이 아니라 쉬는 것이다.
방학과 휴가는 쉬는 것이다.
쉬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방학과 휴가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알기 전에 맞이하고 떠난다.
차가 넘치는 여름휴가 도로에 있으면 고행길 같기도 하고 레밍이 된 기분도 든다.
무엇을 위해 이 도로에 있는가?
여름휴가에 남보다 더 많이 즐거워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설렘으로 둔갑해서 과한 열정으로 드러난다.
여름휴가 끝은 몸과 마음이 지쳐서 낭패감으로 일상에 복귀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쉬려고 노력할수록 지쳐간다.
여름휴가를 떠나는 것은 쉬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휴가 자체가 경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여름방학에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단 한 번이라도 부모와 함께 하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어디로 떠나지 않더라도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부모와 형제는 많은 시간을 각자 바빴다.
사실 바쁘지 않아도 여유는 없었다.
부모는 어둠처럼 몰려오는 불안에 항상 도망치듯 쫓기고 있었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부모 얼굴은 긴장과 피곤이 범벅되어 있었다.
방학도 휴가도 없는 부모에게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방학은 아쉬움, 서운함이 쌓여 쉬어도 부족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휴가를 보낼 때 무조건 즐겁기를, 만족스럽기를 바라게 되었나?
쉰다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쉬고 싶은 마음은 큰데 쉬면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오래 쌓인 불만족감 때문인 것 같다.
불만족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만족스럽게 쉬고 싶다는 형태로 드러난다.
빨리 만족하길 바라는 마음은 조급함을 불러오고 오히려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지치면 만족에 더 매달린다.
쉬고 싶지만 쉬지 못하는, 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지 않는다.
휴가 갈 돈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누군가 훼방을 놓아서, 계획이 완벽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서 완벽한 방학, 휴가 계획을 짜지 못해서가 아니다.
휴가를 멋지게 보내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디론가 떠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불만족이, 슬픔이, 아쉬움이,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못하고 쌓인 부정적 감정을 짐처럼 주렁주렁 달고서는 어떤 계획이 있어도 쉽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만족에 대한 지나친 핑크빛 기대가 생기고 스스로 이 기대와 경쟁을 한다.
이상적인 기대는 환상이 되어 현실은 늘 지고 만다.
이쯤 되면 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쉬거나 쉬지 않거나 지치고 짜증 나는 것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매년 돌아오는 방학과 휴가가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올 여름휴가는 계획 없이, 기대를 내려놓고 특별한 의미 없이 맞이하면 어떨까.
쉬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고 그저 내가 원했던, 원하는 것을 살펴본다면.
쌓인 조급함과 억울함, 아쉬움을 살펴본다면.
어디론가 멋진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