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센터를 방문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고통스럽다.
특히 고통을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일수록 고통스럽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결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이번 생은 망했다.”
그러면서도 포기가 안 되어 괴롭다.
억울하고 화난다.
상담에 오기까지 지뢰밭, 가시밭을 건넜다.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고통을 해결할 수 없을까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쉽게 선택해서 상담센터에 온 것이 아니기에 절실하다.
이런 내담자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상담자가 상담을 잘하려면 자신을 아는 만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담자도 상담을 받는데 이를 자기분석이라 한다.
자기분석을 받으며 상담받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했기에 내담자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담자는 오래 고통받았고 고통을 끝내고자 하는 열망이 크기 때문에 상담센터에 오면 임팩트 있는 대답을 듣기 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상담은 밍밍하게 느껴질 수 있다.
상담실에 들어오면 상담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
오히려 뻔한 것을 물어보기도 한다.
어떤 내담자는
“당연한 걸 왜 물어요?”
라고 한다.
예를 들면 자식으로 도리나, 부모 의무,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하는지 등이다.
때로 상담자의 질문은 선문답 같기도 하다.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하기도 하면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나 모르신 것 같습니다.”
“부모가 미워서 효자가 되셨군요.”
일상에서 성립하기 어려운 말들은 놀랍게도 상담에서는 통한다.
“언제부터 엄마의 남편으로 사셨나요?”
이렇게 질문하면 화를 내는 내담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정확한 시기를 바로 말한다.
현실에서 “엄마의 남편”이란 말이 가당하기나 한가?
상담 실제에서 나누는 대화는 일상 대화와 다르다.
음성을 주고받지만 심층 심리를 포함한 상징적 의미를 띤다.
상담실에 들어오기 전 상담에서 나누는 대화가 일상 대화와 다름을 안내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담실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일상과 다른 대화가 가능하다.
표면으로는 일상에서 느끼는, 겪은 이야기를 하지만 입체적인 대화가 된다.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고 현재 에피소드는 과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는 미래가 섞이기도 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상담 대화는 독특하다.
비슷해 보이는 주제라 하더라도 하늘 아래 똑같은 이야기, 고통은 없다.
누가 더 고통스럽고 덜 고통스러운지 비교할 수 없다.
당장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내담자일수록 고통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해결하려면 과정이 필요함을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과정 없이 마치 요술봉이나 마법 지팡이가 있어서 한순간에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초심상담자일 때 막무가내인 내담자를 만나면 내담자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결과는 실패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
불가능한 이유는 속담과 같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묶어 쓸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노력하는 상담자는 내담자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것인가?
겉으로는 애정이 넘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속으로는 거대자기, 자기애적 충족 욕구, 이상화 열망 역전이일 가능성이 있다.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내담자에게 마음이 쓰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내담자 고통에 무감하라는 것이 아닌 고통에 대한 이해를 통해 진짜 고통을 만나도록 도와야 한다.
과정을 무시하고서 고통을 해결할 수 없음에도 상담자를 밀어붙이는 내담자는 화가 난 것이다.
화가 나면 뚜껑이 열려서 사고가 정지된다.
논리적 사고가 어려워서 막무가내가 되는 것이다.
또는 고통을 해결하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이 진짜 원하는 것일 때도 있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조력할 수 있는 것은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법사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내담자가 과정을 무시하게 되는 마음을 알게 도와주는 것이다.
어쩌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단단한 믿음 때문에, 어차피 해결될 수 없으니 과정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절망감일 수 있다.
내담자에게 초점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담자는 막무가내인 내담자를 만나면 매우 당황스럽다.
마법사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내담자 요구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무능한 상담자나 전문가가 아니라고 비난받을까 의미 없는 도전을 하게 된다.
비현실적 요구를 하는 내담자와 씨름하는 것은 기운이 빠지는 일이지만 전문가라면, 내담자에게 애정이 있는 상담자는 은혜나 조언을 내려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당장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담자를 향해 화를 내는 내담자와 씨름을 피하지 않는다.
마치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하는 엄마와 비슷한 심정이다.
엄마라고 아이의 모든 고통에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엄마는 고통받는 아이 곁을 지킨다.
어떻게 하더라도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혼자 두지 않는다.
아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힌트를 준다.
그 과정을 함께 하기 때문에 아이의 애씀을 알고 공감이 된다.
결과와 상관없이 아이는 인정받는다.
물론 좋은 결과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핵심은 아이가 과정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다.
과정을 인정받은 아이는 성장한다.
모든 문제, 고통에 정답을 줄 수 있지 않기에 또는 정답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입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조언은 단편적이고 폭이 좁은 권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입체적이지 않다.
단순한 답이며 하달되는 지침에 가깝다.
하늘 아래 고통의 원인과 양상은 다 다른데 어떻게 조언으로 해결이 될까.
조언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담자는 망상에 빠져 있거나 자기애적일 수 있다.
때로 상황에 따라 조언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되도록 조언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상담에 오는 내담자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안 되기 때문이다.
부부나 연인, 친구 등 특별한 관계에서 서로 이해하고 조율하면 갈등이 적고 편안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지만 안 된다.
이해는커녕 비난하고 조율은커녕 공격한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치명상을 입는다.
편안하기를 바라는 중요한 관계가 역설적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는데 왜 안 될까?
자전거 배우기를 떠올리면 아는데 안 되는 이유 이해에 도움이 된다.
자전거 구조를 배우고 작동법을 배우고 타는 법을 “머리”로 배운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에게 비법도 “머리”로 듣는다.
이 모든 것을 조언으로 생각하면 된다.
방법과 비법을 머리로 안다고 해서 자전거는 타지 못한다.
그래서 답답하다.
조언과 다른 느낌이다.
머리로는 결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그렇다고 방법과 비법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도움이 되지만 핵심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는 핵심은 균형을 포착하는 것이다.
균형을 만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때까지 계속 시도하고 연습한다.
될듯하지만 어렵다.
넘어지고 땀이 나고 긁혀 피가 맺힌다.
숨도 가빠지고 지친다.
그만두고 싶지만 자전거를 타고 시원하게 달리고 싶어서, 지금까지 노력이 억울해서 다시 자전거를 탄다.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할 못난이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자전거를 타거나 못 타는 것은 (극단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타려고 시도하고 연습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달렸다.
계속 반복하면 어느 순간 균형을 느낀다.
한쪽 발을 페달에 올리고 자전거를 몸으로 밀다가 나머지 한 발을 페달에 올릴 때.
아주 짧은 순간 균형을 느낀다.
곧 쓰러지더라도 균형감을 느낀 순간은 완벽하다.
이러저러 자전거 타는 법을 설명하는 것보다 균형감을 느끼는 것이 전부다.
비법은, 조언은 데코레이션이다.
때로 없는 것이 낫다.
훌륭한 개소리가 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