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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Feb 24. 2024

마지막 인사

 부산에 사는 셋째 이모의 딸이 위독해 급히 내려간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나에게는 이종사촌 동생인 셈인데 이모가 오래전에 이혼해 자식들과도 남처럼 살다가 몇 년 전 어떤 사연이 있는지 갑자기 이모부와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엄마의 자매들은 서울, 여수, 부산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젊어서는 서로 먹고살기 바빠 연락이 뜸하다가 모두 육십 줄이 넘은 뒤에야 무제한 통화요금에 기대어 하루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핑계 삼아 쓸데없이 세세한 제집 자식들 소식을 전해가며 연락하는 일이 잦았다. 자매들끼리 수다가 늘어나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말이라는 것이 한 다리 건너 전해지기도 하므로 중간자의 생각이 더해져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없이 살아도 우애는 좋다며 자부하던 자매들의 사이는 자식들의 혼사를 거치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식들의 결혼과 경제적 안정이 곧 자신들의 계급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미묘한 열등감이 균열의 근원이었다.

 각설하고 갑작스러운 소식에 외할머니 장례식 때, 한 번 본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 때 본 기억은 없고 다 커서 서른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 만난 이종사촌에게 뭐 어떤 감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인중에 까만 점을 가진 단발머리의 무뚝뚝한 경상도 아가씨 정도? 그 아이가 자궁암으로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건 그로부터 일 년 뒤였다. 의사가 자궁적출을 권유했는데 나중에 결혼해 아이를 낳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항암치료만 하면서 투병하고 있다는 거였다. 엄마와 이모들은 지가 사는 게 먼저지 애는 무슨 애냐면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것에 한참을 갑론을박하다가 주워들은 건강 상식들을 동원해 가며 알맹이 없는 대화들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궁금해하지 않아도 엄마가 전달해 주는 이야기들로 대충 상황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는데 항암치료 결과가 좋지 않아 전이가 이뤄져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쩌면 좋은 소식을 기대하긴 어렵겠다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한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일 분 일 초가 고통스러웠을 시간으로 무심하게 흘러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서너 시간 지났을까.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받았다. 

 "막 부산역에 도착했는데 수진이가 갔단다. 마지막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서둘렀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 아이 삶이 여기까지라서 안타깝네. 이모 잘 위로해 드리고 와."

 나도 조문을 가야 하나 어쩌나 싶어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이종사촌이기는 하지만 살면서 딱 한 번의 만남과 엄마를 통해 소식만 전해 들었고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고민이 됐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상주와 나와의 관계에 따라 부고가 있으면 조문을 가기도 하니까 고인이 된 동생의 장례식에는 부산 이모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가지 않을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엄마가 딱히 조문을 강요하지 않았기에 나의 고민은 짧게 끝났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 사진에 대고 절하는 것보다 살아 있을 때 찾아가 얼굴 한 번이라도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개똥철학도 짧은 고민에 도움을 더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례식장에 갈 일이 점점 많아진다. 누군가 영면에 들면 사회 관습에 따라 형식적인 장례 절차를 밟는다. 고인과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애도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때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과의 인사를 나누는 곳이 장례식장이다.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들의 호구조사가 반복되기도 하고, 웃으며 떠들다가도 시간이 되면 곡을 하면서 울기도 하고. 외할머니 장례식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외할머니와의 추억은 거의 없어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셨기에 애도보다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지켰다. 화장장에 관이 들어가는 모습이 슬픈 게 아니라 나의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보내며 우는 모습이 슬퍼 울었다. 

 사후세계가 있거나 말거나 죽고 난 뒤에 제사상에 번지르하게 음식 차리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귀신이 와서 차린 음식 먹는 것도 아니고 상 한 번 차려 놓고 절하고는, 몽땅 산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데. 그래서 나는 종종 엄마에게 이렇게 못 박았다.

 "난 엄마가 죽으면 제사 지내 준다는 약속은 못 하고, 그냥 엄마 살아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

 "그래! 엄마 기일에는 제사 지내지 말고 너희 두 남매 만나서 맛있는 밥 먹으면서 엄마 얘기하면서 시간 보내."

 엄마와 나는 그렇게 명쾌한 합의를 보았다. 

 분명 형식적인 관습이 가지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세대에 따라 관습도 변화할 것이다.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퇴근길에 꽃집에 들러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샀다. 집에 돌아와 명상할 때 피우는 인센스 스틱을 꺼내 불을 붙이고 그 곁에 국화를 놓았다.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 간 동생에게, 무신론자지만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혼자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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