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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Jul 15. 2024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연재 소설

 자신의 마음과 꼬리를 무는 대화로 연속적인 날들을 보내던 중 지원은 끝장을 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죽음과 맞댄 삶의 끝을 생각했을 때 긴장이 탁 풀리며 갑자기 몰려오는 개운함의 아이러니 속에서 지원은 묘한 환희를 느꼈다. 오롯이 자신을 중심에 두고 다시 살아내 보기로 마음먹으면서 작은 캐리어 하나에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보증금 없는 고시원에 한 평짜리 방을 얻어 작은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맛본 해방감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원이 집을 나온 날, 바깥은 요란한 돌풍이 쉬지 않고 불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억센 빗줄기가 지원이 몸을 누인 작은 방의 유일한 숨구멍인 창문을 휘갈겼다. 세상이 무너질 듯 천둥 번개가 번갈아 장단을 맞추는데도 안온감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지원은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

 지원이 잠에서 깨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깨끗하게 씻겨 찬란한 빛을 냈다. 모두 변한 것 없이 제자리에 있는데 지원의 눈엔 달라 보였다. 그때 지원의 마음이 말했다.

 ‘네가 변했잖아. 네가 다르게 보잖아. 그렇게 보면 매일 같은 하루도 흥미로울 거야.’

 지원은 걸었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걸었다. 그리고 걸음이 멈춘 곳, 익숙한 나무 대문 앞. 지원은, 마음으로 들어갔다. 화단 가득 얼굴을 내밀고 있는 꽃들이 지나는 봄바람에 몸을 흔들며 인사하듯 지원을 환대했다.

 윤희는 아침에 들여온 딸기를 갈아 주스를 만들고 베이글을 구워 쟁반에 담았다. 그리고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창밖만 내다보다 가는 지원에게 들고 갔다. 아직 주문하지 않았는데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윤희를 지원이 어리둥절히 올려봤다.

 ‘딸기가 아주 맛있어요. 오늘은 단골손님께 제가 드리는 스페셜 메뉴에요.’

 윤희는 앞치마에서 메모지를 꺼내 적어 지원에게 내보였다. 지원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감사 표시를 했다. 윤희는 다시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지원의 손에 건네주고 활짝 웃어 보이며 카운터로 돌아가 들어오는 손님을 맞았다. 지원은 손바닥에 놓인 윤희의 메모를 읽고 또 읽었다.

 ‘무엇이든 응원해요. 무얼 하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지원은 메모지를 지갑 속에 곱게 끼워 넣었다. 어떤 상태이든 응원한다는 말이 꼭 보호막이 되어 지켜주는 느낌이 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지원은 윤희의 메모에서 발견했다. 주문을 외듯 소리 없이 입으로 오물거리며 반복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응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지원은 딸기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달큼한 딸기향이 기분 좋게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지원은 베이글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자신에게 되뇌었다.

 ‘나를 껴안을 힘을 내보자. 힘들면 잠깐 쉬어가면서 다시 가보자.’     



 윤희는 진숙이 선물한 그림과 태수의 명함을 번갈아 보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 화면을 열었다. 카페 휴무일에 장소를 정해 윤희는 일 년 만에 엄마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태수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박윤희에요. 답을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내 줄 마음의 공간이 없어요. 미안합니다.

 거절을 에둘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적어 보냈다. 윤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명함을 서랍에 넣었다. 진숙이 정말 자신의 마음을 읽어낸 걸까, 윤희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곱씹었다. 그러다 진숙에게 묻고 싶은 말이 생각나 필담 노트를 꺼냈다. 노트 한 귀퉁이가 절반쯤 접힌 면이 펼쳐졌다. ‘어’하고 보는데 윤희가 고백하듯 휘갈겨 쓴 말에 진숙의 답이 적혀 있었다.

 ―제가 사는 세상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요. 다른 사람의 말이 안 들린다고 해서 내 마음이 하는 말까지 안 들리는 건 아니고, 입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표정과 눈빛으로도 말할 수 있으니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나한테 하는 말들이 쓰레기 같을 때가 더 많은 거 같아요. 마음에 쌓인 불편한 감정들이 모이면 쓰레기가 된대요. 저도 그럴 때 많아요. 사장님, 우리 같이 분리수거 할래요?

물음표 끝에 크게 웃는 표정을 크게 그려놓은 진숙의 천진함에 읽는 동안 무표정이었던 윤희가 흐하, 웃었다. 진숙이 그려놓은 이모티콘처럼.

 핸드폰 액정에 문자 알림창이 떴다.

 —그런 이유라면 지금은 시간을 좀 흘려보내면 어떨까요? 공간은 정리하다 보면 생기기도 하니까요.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진숙은 태수의 답장을 읽고 고개를 들어 지원을 보았다. 자신이 지원에게 했던 말을 태수가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응원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자로 잰 듯 냉정하게 날을 세우고 있음을 윤희는 새삼 깨달았다. 가슴에 엉켜 묶여있는 줄이 단번에 끊어진 듯 숨이 한 번에 가슴팍을 통과했다. 윤희는 어디에서 발현됐는지 알 수 없는 숨들이 몸 안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굉장한 희열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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