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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Jul 08. 2024

여자의 뒷 모습

연재 소설

 윤희의 눈이 커졌다. 출근하면서 화원에 들러 마당에 심을 꽃모종 골라 배달 주문을 했는데 화원 배달차와 함께 정오쯤 진숙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당 야외 테이블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던 윤희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진숙을 껴안았다.

 “이산가족 상봉이유? 봄바람 따라 반가운 사람도 왔나 보네.”

 배달차 아저씨는 짐칸에 실린 모종들을 마당에 부려 놓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윤희는 진숙의 손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필담 노트를 꺼내주고, 커피를 내렸다. 마지막 모종판을 내려놓는 배달차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포장 컵에 담은 커피를 건넸다. 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떠났고 마당에 부려 놓은 꽃모종들이 화사한 봄기운을 뿜어냈다. 윤희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윤희는 노란 나비 그림이 그려진 찻잔에 담은 커피를 진숙 앞에 내려놓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진숙은 윤희에게 필담 노트를 내밀었다. 

 ―오랜만이죠? 손님이 많이 늘었네요. 

 ―궁금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대학도 가려고요. 사장님 덕분이에요. 

 ―?

 윤희는 물음표 하나를 노트에 그려놓고 진숙을 쳐다봤다. 진숙은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다. 진숙의 얼굴이 영롱하게 빛났다.

 ―사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마음을 본다면서요. 그 눈으로 보이는 것들을 그려보려고요. 그림은 눈과 손만 있으면 되니까, 저에게 딱 이에요.

 ―그럼, 이제 베이킹은 안 해요?

 진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장애가 있으니까,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게 싫어서 대학도 안 갔어요. 그렇게 시간 죽이기하고 있다가 여기에 우연히 들르게 된 건데, 사장님하고 이렇게 얘기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렇게도 일반인과 편하게 소통할 수 있구나, 편안하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죠. 사장님이 제가 마음을 본다고 하셨던 말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중학교 때 그만뒀던 그림이 생각났어요.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면 좋겠다!

 ―좋은 소식이네요. 진숙씨가 행복하다면, 뭐든 좋은 일이에요.

 진숙은 가방에서 드로잉 노트를 꺼내 윤희에게 펼쳐 보였다. 그동안 진숙이 스케치한 그림이 가득 담겨있었다. 한 장씩 넘겨 보던 윤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숙의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노트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윤희에게 진숙은 가방에서 작은 액자를 꺼내 윤희에게 건넸다. 노란빛 가로등이 비추는 어두운 밤, 양옆으로 구부러진 길 가운데 서 있은 여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윤희는 가만히 그림을 보다가 그림 속 여자 한 번, 자신을 한 번 가리키며 진숙에게 눈으로 물었다. 진숙은 슬며시 웃었다. 윤희는 다시 그림 속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선물이에요?

 ―네, 사장님께 드리려고 공들여 그렸어요.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미술학원 가는 길에 그림도 드리고 인사도 하려고 들렀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윤희는 훨씬 편안해진 진숙의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대문 밖까지 진숙을 배웅해 주고 화단에 오밀조밀 꽃을 심기 시작했다. 쪼그리고 앉아 모종삽으로 흙구덩이를 파내 화분 흙째로 심었다. 윤희의 손과 눈은 화단을 가꾸고 있었지만, 윤희의 머릿속에서는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떠다니는 달처럼 진숙이 선물한 그림 속 여자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진숙은 언젠가 말했던 거처럼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불안한 윤희의 모습을 그린 걸까, 아니면 늘 어두운 밤길을 걷는 듯한 삶을 살고 있는 윤희의 어두운 내면을 읽고 형상화한 걸까. 

 윤희는 오그라트리고 있었던 자신을 펴내 마주해야 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직감했다. 손으로 흙을 고르고 모종들을 깊이 심으면서 마음을 다졌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으로 물려두었던 감정을 끄집어내 터트릴 힘이 이제는 채워졌다. 진숙의 그림이 윤희에게 준 무언의 울림은 봄이 오고 있는 어느 날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날아와 윤희의 마음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새벽 광장에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겨우내 휑했던 화단에 오색영롱한 생명들이 뿌리를 내렸다. 새 터전에서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물뿌리개로 흠뻑 물을 주었다. 마른 겉흙이 물을 머금었다가 쑥 삼켜 내렸다. 꽃잎에 맺힌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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