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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Jul 01. 2024

호기심과 호감 사이

연재 소설

 태수는 마지막 내원자가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 옷을 갈아입고 퇴근을 서둘렀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데이트 가세요?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시는데요?”

 병원 문을 나서려는데 데스크 직원이 태수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한다. 태수는 대답 없이 손만 흔들어 보였다. 병원이 있는 덕수궁 돌담길 초입에서 정동길을 가로질러 마음을 향해 걸었다. 추위가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걸을 만한 날씨였다. 태수는 지난주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윤희와의 만남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휴무였던 어제도 비슷한 시간에 윤희를 발견했던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기다렸었다. 아쉽게도 두 번째 우연은 겹치지 않았다. 태수는 마음에서 움트는 미묘한 감정이 카페 사장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에서 비롯된 호기심인지, 윤희에 대한 호감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오늘은 용기를 내 보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면서 걷다 보니 금세 날이 어둑해졌고 마음에 도착했다. 태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앞치마를 한 윤희가 손님 테이블에 차를 나르고 있었고 주홍빛 조명등이 낮게 깔린 카페 안은 아늑해 보였다. 그 순간, 처음 태수가 이 카페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마당의 정원 등에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차를 내려놓고 통창으로 마당을 내다보던 윤희는 태수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카페 영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오겠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윤희는 카운터에 앉아 턱을 괴고 태수가 남기고 간 메모를 뚱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보았다. 태수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메모지만 윤희에게 내밀고 갔다. 윤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무언가 고민할 때 나오는 윤희의 버릇이다.

 문이 열리고 젊은 커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들어왔다. 윤희는 태수의 메모에서 시선을 거두고 손님을 맞았다.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손님에게 카페 이용 안내서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온화한 표정이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 묻어나는 사람들이었다. 사랑이 차고 넘치는 연인들의 시선은 저런 걸까, 윤희는 생각했다.    


  

 사위가 어두워진, 아홉 시.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윤희는 카페 조명의 스위치를 내렸다. 오늘도 많은 생각과 마음들이 머물다 간 공간. 윤희는 내일은 출근 전에 화원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열린 대문 사이로 청바지에 검은색 누빔점퍼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의 태수가 서 있었다. 윤희는 속으로 ‘아!’ 했다. 태수가 남긴 메모를 몇 시간 사이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문 외등 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태수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왠지 모르게 들떠 보였다. 윤희는 태수를 발견하고 잠시 주춤하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다.

 “안녕하세요. 저, 잠시만.”

 윤희가 밖에 내놓았던 입간판을 옮기려 하자 태수가 얼른 낚아채 마당 안으로 들였다. 윤희가 대문을 닫고 보안 잠금을 한 뒤, 어색하게 서 있는 태수를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네, 저…, 같이 좀 걸을까요?”

 태수는 두 손을 모아쥐고 어쩌질 못했다. 그 모습에 윤희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서촌 쪽으로 걸어볼까요?”

 윤희가 나서서 방향을 잡았다. 태수는 윤희를 따라 나란히 걸었다. 태수는 입속에서 우물거리던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어제 기다렸어요. 지난주에 우연히 만났던 곳에서.”

 윤희는 고개를 돌려 태수를 쳐다봤다. 태수는 윤희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말을 덧붙였다.

 “저는 서른여덟 살이고, 미혼입니다.”

 별안간 묻지도 않은 제 신상을 밝히는 태수가 어이없어 윤희는 큭 웃었다. 그러다 푸하, 소리 내서 웃었다.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었나 싶다. 늘 가느다랗게 미소만 띄우던 여자가 소리 내 웃는 모습에 정작 태수는 멋쩍은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웃어서 미안해요.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셔서….”

걸음을 멈춰 웃음을 머금고 태수에게 시선을 맞춘 윤희의 얼굴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볼 우물이 예쁘게 패였다. 태수의 얼굴에도 환하게 웃음이 번졌다. 태수는 사람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윤희의 시선이 꽤 매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네요. 친구 하면 되겠어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윤희가 말했다. 태수의 말과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윤희였다. 용기 낸 상대를 면구하게 하지 않으면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려는 윤희의 속내가 담긴 말이었다. 태수는 윤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태수는 생각이 끝났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윤희씨랑 그냥 친구는 하기 싫은 거 보니까 호기심이 아니라 호감인가 봐요. 윤희씨에 대한 감정이 둘 중에 뭔지 궁금했는데, 방금 답을 찾았어요.”

 윤희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지나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도로변의 소음이 난무한 가운데서 두 사람은 마주 섰다. 리모컨의 볼륨을 낮춘 것처럼 윤희는 갑자기 주변의 잡음이 소거됨을 느꼈다. 태수는 개운한 듯 아주 활짝 웃었다. 윤희는 태수의 웃음을 보았다. 저녁 무렵, 카페를 찾았던 젊은 커플의 얼굴에서 보았던 그 웃음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당황스러우셨을 거고, 마음은 집까지 바래다 드리고 싶은데 불편하실 테니까요,”

 태수의 말에 윤희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들썩이자, 태수는 선 자리에서 돌아서면서 재빨리 윤희의 말을 덮었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은 이만. 그리고 이거.”

 태수는 자신의 명함을 윤희에게 건네고 성큼성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윤희는 태수가 손에 쥐어준 명함을 들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런 내적 감정의 동요가 없는 자신의 건조하고 어두운 감수성의 밑바닥을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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