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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Jun 17. 2024

마음 휴무일

연재 소설

 윤희는 얼마 전, 카페 근처로 이사 했다. 출퇴근하며 오가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틈이 날 때마다 인왕산 둘레길을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더 좋았다.

 카페를 열면서 매주 월요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카페 주변에 회사가 많은 상권을 생각하면 주말 휴무가 알맞겠지만, 윤희는 왠지 남들이 모두 일하는 요일에 휴일을 즐겨보고 싶은 우스운 충동이 일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카페, 마음’은 매주 월요일이 휴무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잠을 자는 듯 꿈을 꾸는 듯한 수면 상태는 늘 아침 여섯 시에 윤희의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윤희는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지 않고 얼른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긴 머리칼을 높이 올려 대충 묶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잠 속에서 헤매던 몽롱한 정신이 깨어났다. 윤희는 자로 잰 듯 머뭇거림 없이 옷을 챙겨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밀려나는 겨울의 끝자락이지만 인왕산 자락의 한기는 그 위세가 맹렬하다. 윤희는 살고 있는 옥인동 골목길을 가로질러 금세 둘레길 초입으로 들어섰다. 몇 주간 윤희를 괴롭히던 불쾌한 긴장감은 잦아들었다. 모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의 파동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윤희의 몸에도 느슨한 평화가 찾아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새어 나왔다. 주말이면 찾는 사람들로 인해 하루 종일 북적이지만, 월요일 이른 아침의 이 길은 더없이 한적하고 운치 있다. 윤희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느릿한 걸음의 발치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오르막길에 올랐다. 옆으로 난 차도를 지나는 자동차가 소음을 냈다가 멀어지면서 간간이 남기는 사위의 고요는 윤희의 머릿속에서 끊어진 필름을 이었다 붙였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기이한 정적.

 길게 늘어뜨려 거실을 가로지르는 해를 가려 어두운 그늘을 만든 커튼 아래 잠을 자듯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

 끝이 붉게 타올랐다 꺼지면서 허공에 가늘고 긴 구름처럼 연기를 그리는 분향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정 사진.

 주저앉아 통곡하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죽일 듯이 쏘아 보기를 반복하는 엄마.

 어느 날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엄마의 남자.

 엄마의 입으로 무수히 토해내는, 씹다 남은 감정의 껍데기 같은 말들.

 비척비척 어두운 거리를 걷고 또 걷는 자신의 후줄근한 모습.

 윤희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필름들이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는 공허함을 느끼다 문득, 얼마 전 잠에서 깨면서 비명처럼 부르짖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한 번도 비워내지 못한 내면에 쓰레기 같은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음을, 단 하나도 제 것이 아닌, 타인의 감정들이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었음을 윤희는 돌연하게 깨달았다. 윤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걸음을 멈추고 발치에서 고개를 들었다. 마치 시간이 관통한 듯 윤희는 어느새 둘레길 중턱에 서 있었다.      




 멀리 초소 책방이 보였다. 인왕산로 중간쯤 위치한 북카페인데, 이제 막 오픈한 듯 직원이 야외 테이블에 엎어 둔 의자를 내려 정리하기 시작한다. 윤희는 잠시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멈춘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는 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윤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앞을 보는데 반대쪽에서 한 남자가 윤희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태수였다. 윤희는 뜻밖의 인물이 눈앞에 등장하자 깜짝 놀란 토끼 눈을 했다. 태수는 재밌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여길 어떻게.”

 “저는 일요일, 월요일이 쉬는 날이거든요. 오늘 카페 휴무일이죠?”

 윤희는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 근처라 쉬는 날에는 아침에 이 길로 산책하는데, 오늘 사장님을 만났네요? 반가워서 아는 척했어요. 저는 김태수라고 합니다.”

 태수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윤희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윤희는 얼결에 태수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했다.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만 맨 손이었던 윤희의 차가운 손이 따뜻한 태수의 큼지막한 손바닥에 감싸졌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죠? 같이 따뜻한 차 한잔 마실까요?”

 태수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초소 책방을 가리키며 윤희에게 물었다. 윤희는 갑작스러운 만남에 난감한 듯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태수는 윤희의 기색을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윤희도 태수를 따라 함께 걸었고 곧 카페 앞에 도착했다. 태수가 성큼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윤희도 마지못해 태수를 따라 들어갔다. 살짝 얼어 있던 얼굴에 따뜻한 내부의 공기가 닿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태수는 창가의 널찍한 자리로 윤희를 안내하고 갓 구운 빵과 따뜻한 레몬차 두 잔을 주문해 왔다.

 태수와 윤희는 마주 앉았다. 아침노을이 부챗살처럼 퍼져 두 사람을 비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태수는 윤희와 어색한 침묵을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보는 윤희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목덜미까지 이어지는 얼굴선이 부드러워 보였고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모습에서 차분한 분위기가 풍겼다. 평일 이른 아침이라 아직 손님이 드물어 카페 내부는 조용했다.

 “아직, 제가 사장님 성함을 몰라요. 카페에 자주 들르면서도 여쭤볼 기회가 없어서….”

 태수는 말을 툭 해 놓고도 뜬금없이 이름을 묻는 게 맞나 싶어서 쭈뼛댔다. 윤희는 여기까지 자신을 데리고 온 기세는 어디 가고 갑자기 머뭇거리는 태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저는 박윤희에요. 레몬차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태수가 늘 레몬차를 주문하던 걸 기억한 윤희가 말을 보탰다.

 “아, 네. 기억하시네요. 윤희, 이름이 예쁘네요.”

 태수는 갑자기 심장이 쾅쾅 울려대는 소리가 귀에 너무 크게 들려 당황스러웠지만,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수 분간 정적이 흘렀다. 태수는 그동안 마음에 드나들면서 윤희에게 호기심과 호감이 뒤섞인 모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단골손님과 카페 사장의 우연한 만남에서 오갈 말은 많지 않았다.

 “우연히 만났는데 갑자기 차 마시자고 해서 실례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윤희는 괜찮다는 듯 씩 웃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을 만나서 당황했을 뿐이에요. 카페 손님을 밖에서 마주친 건 처음이거든요. 괜찮네요, 우연한 만남.”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마음, 말이에요. 대화가 없는 카페를 운영할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저는 입간판 보고 이끌려서 들어갔는데 정말 낯설었어요.”

 태수의 진지한 물음에 윤희는 골똘히 생각하다 태수의 눈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저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제 마음이 하는 말을 좀 듣고 싶어서요. 대화를 꼭 누군가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요…….”

 태수는 일부분 철학적인 답을 하며 눈을 맞추는 윤희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귀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윤희는 말끝의 여운을 늘어뜨리다 다시 씩 웃었다.

 “대답이 너무 진지했나요?”

 태수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생각을 곱씹게 하는 말이네요. 남은 산책길에 함께 해도 될까요?”

 윤희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다 짧게 대답했다.

 “네.”

 태수와 윤희는 카페를 나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윤희는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 걸었고, 태수는 윤희의 발걸음에 맞춰 걸으며 말이 없는 윤희를 곁눈으로 흘끔거렸다. 태수는 윤희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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