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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Jun 10. 2024

마음이 말했다

연재 소설

 “너 언제까지 이렇게 쉴 거니! 회사 면접은 보고 있어?”

 일 년 전 회사를 그만둔 뒤로,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지원의 뒤통수에 대고 그녀의 새엄마가 독촉하듯 말했다. 지원은 엄마가 많다. 어릴 때 지병을 앓다 죽은 친엄마를 비롯해 그동안 아빠의 옆자리를 거쳐 간 여성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가 부족하다. 지금의 새엄마는 이 년 전, 지원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아빠의 팔짱을 끼고 찾아왔고 그날로 안방을 차지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지원은 독립을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작은 회사의 사무직원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지원의 월급 대부분은 생활비 명목으로 아빠를 통해 새엄마에게로 흘러갔다. 한 번도 입 밖으로 자기 생각을 뱉어본 적이 없었던 지원은 수동적이었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지 말라면 정지된 상태로 그렇게 마른 나무껍질처럼 살았다. 생명체라곤 아무것도 없는, 모래바람만 휘날리는 그런 황폐한 사막 같은 삶은 지원을 그렇게 대했다. 

 화사한 봄빛의 기운이 암울한 회색빛으로 느껴지던, 코끝을 스치는 대기의 청량감이 답답하게 느껴지던, 코로 들이마신 공기가 기도의 중간에서 막혀 숨이 쉬어지질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입으로 숨을 꺽꺽 토해내야 했던, 모두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압도적으로 들었던 그날,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면의 공허가 원인 모를 슬픔으로 변모해 지원을 덮었다. 길 위에 그대로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계속 걸었다. 같은 길을 빙빙 돌면서 바닥만 보고 내내 걸었다. 그러다 멈춘 곳, ‘카페, 마음’이었다.

 오늘도 이곳에 들렀다. 늘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도 가방에 넣어놓고 잊어버리게 되는 곳이다. 지원은 핸드폰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람들은 더 빠른 속도로 뛰어가려고 야단인데 혼자 뒤로 걷는 느낌이 들 때마다 마음으로 파고드는 박탈감에 괴롭다. 회사를 그만두고 지원은 매일 아침 인왕산 성곽길에 올랐다가 카페에 들른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곳에서 가만히 앉아 적요한 상념에 빠져 있으면 편안한 정적이 크레셴도를 그리며 자신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도 채워진 적 없는 자신을 힘껏 감싸 안는 그 무언의 힘.



 지원은 물었다. 그리고 지원의 마음이 말했다.

 ‘너는 왜 힘들어?’

 ‘모르겠어. 그래서 더 힘들어. 나는 껍데기 같아. 알맹이 없는 속 빈 껍데기.’

 ‘껍데기? 무슨 말이지?’

 ‘움직이지만 살아있지 않아. 숨을 쉬고 있다는 게 목적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꼭 길을 걷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해?’

 ‘…….’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살아가는 거야.’

 ‘하지만…, 계속 질척한 늪으로 빠져들어. 축축하게 젖은 더러운 걸레가 된 기분이야. 늘 그랬어. 아무리 빨아도 오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아무리 말려보려고 햇빛에 널어보아도 마르지 않은, 지저분하고 꿉꿉한 걸레.’

 ‘누구나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을 거야. 네가 너를 온 힘을 다해 사랑해 봐. 너를 보호하는 울타리는 네가 지어야지. 아무나 너의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흠, 그렇다면 난 지금 힘이 없어. 숨을 쉬는 것도 수고롭게 느껴져. 그런데 울타리를 지으라고? 잘 모르겠어.’

 ‘네가 네 안으로 더 웅크릴수록 검은 늪이 네 발을 더 세게 잡아당겨. 그런 상태에 너를 두는 건, 위험한 일이야. 힘을 내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온전한 네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거야. 그러다 보면 목적도 생기지 않을까? 너를 사랑해!’

 지원은 입속으로 나긋이 중얼거렸다. 

 “나를 사랑해…….”

 지원은 가끔 얇은 유리막이 자신을 감싼 미묘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세상에서 유리된 채로 혼자 동떨어져 있는 외계인이 된 기분이랄까.




 지원이 마주 앉은 통창을 통해 날아든 날카로운 햇빛은 지원을 바싹 말리려는 듯 내리쬔다. 누군가 지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지원은 돌아본다. 윤희가 메모지를 지원에게 내밀었다.

 ‘햇빛이 따가우시면 블라인드를 내려 드릴게요.’

 지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희는 빙그레한 미소를 띠고 돌아섰다. 지원은 습한 기운이 자신이 옭아매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 강렬한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렇게 지원은 자신도 모르는 힘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봄이 오면 지면으로 잎과 줄기를 밀어 올리기 위해 겨울 언 땅 아래에서 햇빛을 빨아 당기며 웅크리고 있는 정체 모를 식물의 덩이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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