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반 Jun 03. 2024

침묵의 고요

연재 소설

 일요일이라 그런지 오전부터 드문드문 들어와 머무는 손님들이 꽤 있다. 일요일에 오는 손님들의 특징은 카페 부근에 주거 공간을 둔 주민들이 대체로 많다. 가족 단위보다는 부부나 싱글들의 방문이 많고 운영한 지 일 년 정도 되니 ‘마음’의 이용 방식이 익숙한 손님들도 제법 늘어 이제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차단된 이 공간을 각자의 방식대로 즐긴다.

 윤희는 손님들이 책장 넘기는 소리,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 멍하니 앉아 허공을 가르는 시선들, 손님들의 매일 다른 표정, 그리고 그들의 침묵에 귀 기울인다. 침묵의 색채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만을 위한 침묵.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을 그들만의 정적.

 캐모마일 차를 우려 마시며 가슴 언저리에서 며칠째 머무르고 있는 불규칙한 파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한 번 시작되면 온몸을 감싸는 긴장과 불안의 근원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순간, 윤희의 머릿속에서는 추상적인 말들이 번란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해 윤희는 급격한 피곤을 느꼈다. 관자놀이 뒤편에서 못으로 철판을 찌익 긋는 두통이 몰려와 몸서리쳐진다. 찌릿한 통증에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쯤이면 이런 상태에 무심하게 응대할 수 있을까. 윤희는 자신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감정의 독점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마음속 깊은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맑고 뜨거운 햇빛이 넓게 부서져 몸과 마음이 바스락거리는 상태에 이르기를. 혼재된 감정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윤희의 혈관을 타고 이리저리 뒤섞인다.      



 썰렁한 창밖 풍경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몽상에 빠져 윤희의 눈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트레이닝복 차림에 코트를 걸친 남자가 불쑥 열린 대문으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긴 다리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와 금세 문을 열고 들어선다. 윤희는 가벼운 목례로 알은체했다.

 동그란 은색 테 안경을 쓴 이 남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처음 카페에 온 날, 음료를 주문하고 계산을 위해 카드를 지갑에서 꺼내다 명함이 함께 딸려 나왔는데 사진이 딱 박힌 명함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태수’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들러 책이나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남자도 윤희의 알은체에 고개를 까딱여 답하고 메모를 내민다.

 ‘뜨거운 레몬차와 샌드위치요.’

 그리고 책장 쪽 푸근한 소파에 털썩 앉는다. 태수는 피곤한 듯 앉자마자 등을 뒤로 기대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서 눈을 뜨니 윤희가 테이블에 찻잔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고 있었다. 태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윤희에게 고개를 꾸벅한다. 윤희는 샌드위치까지 마저 내밀고 자리로 돌아갔다.     



 태수는 뜨거운 김이 나는 레몬차를 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한기가 가시는 듯 움츠렸던 몸이 노곤해졌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입속에서 잘근잘근 씹으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봤다.

 ‘하, 이번 주도 쉽지 않았다.’

 천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실링팬을 따라 안구운동 하듯 눈동자를 빙빙 돌렸다. 그러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걸쳐 머리를 괴고 정면으로 보이는 통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페 사장이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느리게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태수의 시선은 윤희를 따라 움직였다. 긴 머리를 반묶음 해 단정히 하고 늘 선하나 긋듯 옅은 미소만 희미하게 띄운 얼굴로 부유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 영묘한 빛이 나는 듯했다.      

 몇 달 전, 태수는 퇴근길 집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곳에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들어왔다. 카페 대문 앞에 놓인 입간판의 문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공간이라….”

 카페의 나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해가 넘어간 어스름한 저녁인데도 여름 한낮의 열기를 품고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에 살갗이 끈적거렸다. 야외 테이블에는 손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한 명이 강아지를 무릎에 앉혀놓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마당을 주욱 둘러보는데 화단에 설치된 태양광 정원 등의 조명이 켜지면서 잘 가꿔진 화단의 이름 모를 야생초와 여름꽃들의 태가 빛을 발했다. 태수는 왠지 비밀의 정원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여자는 말없이 웃어 보이며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했다. 드문드문 자리한 손님과 공간 사이를 떠도는 음악을 제외하곤 대화 소음이 가득 찬 여느 카페와 달리 조용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늑했다. 묘한 분위기에 압도돼 카페 문을 닫을 때까지 넋 놓고 앉아 있었더랬다.     



 병원에서 다양한 내원자들이 쏟아내는 말을 매일 듣다 보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날 저녁 태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침묵의 고요를 맛보았다. 침묵의 상태가 청각의 기능을 잠시 멈추게 하자 끊임없이 불명확하게 돌아가던 생각을 잠재웠다. 머릿속 긴장이 풀리면서 육체의 안온함이 극대화됐다. 태수는 지금 마당을 거닐고 있는 윤희를 지긋이 응시하며 이곳의 오묘한 분위기와 편안한 적막감이 왠지 저 카페 사장에게서 흘러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