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와 다르게 아침저녁으로만 서늘하고 낮 기온이 오르면서 한낮에는 이른 봄빛의 기운이 대기에 머물렀다. 윤희는 출근해서 오픈 준비를 해 놓고 마당의 화단 정리를 했다. 이제 곧 봄꽃을 심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작년에 카페를 열면서 사다 심었던 벚꽃 나무 묘목에도 가지마다 꽃눈이 올라왔다.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와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낯익은 여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근처에 주한오만대사관이 있는데 가끔 회의 때 마실 커피를 사러 들르는 대사관 직원들이다. 윤희는 여자들과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히잡을 쓴 여자는 능숙하게 카운터에 비치된 메모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썼다.
‘안녕하세요. 이제 봄 와요. 아메리카노 10개 주세요.’
윤희가 웃으면서 메모 밑에 답을 썼다.
‘글씨가 점점 예뻐지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자들은 웃으면서 마당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기다리려는 모양이다.
윤희는 커피를 내리면서 문득 진숙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카페에 들렀는데 몇 달째 두문불출이다. 진숙은 처음 카페에 들렀을 때 카운터에서 주문을 기다리는 윤희에게 자연스럽게 수어를 했다. 윤희가 당황하자 ‘이곳은 무언(無言)으로 운영되는 카페입니다. 잠시 말을 머금어 보세요.’라고 쓰인 문구를 가리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연은 진숙이 입간판의 문구를 잘못 해석해 자신과 같은 농인이 운영하는 카페라고 생각해서 들어왔고 수어로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게 계기가 되어 진숙과 윤희는 서로 필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커피를 포장해 마당에서 영어로 소곤거리고 있는 여자들에게 가져다주었다. 히잡을 쓴 여자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양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다가와 윤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눌한 발음이지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좋. 은. 하. 루. 보. 내. 요.”
윤희는 꽃이 피어나는 듯 활짝 웃었다. 두 여자는 손을 흔들며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윤희는 웃음의 여운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맑고 청량한 하늘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푸른빛이었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하루의 시작이다.
이곳의 시간은 늘 고요하게 흘러간다. 큰 변수가 없는 이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윤희에게 위로가 된다. 윤희는 숨쉬기에 오롯이 집중해 본다. 코로 길게 들이마신 숨이 목구멍을 통해 들어가 가슴팍에서 넓게 퍼질 때 묘한 희열이 느껴진다. 언제쯤이면 먼지가 뿌옇게 낀 유리창 같은 머릿속이 깨끗해질까. 윤희는 무의미한 시선의 초점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카운터 한쪽에 두었던 손때 묻은 노트에서 멈췄다. 진숙과 필담을 나누던 노트다.
―죄송해요. 저는 농인이 운영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입간판만 보고서.
―괜찮아요. 종종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제가 조용한 걸 좋아해서 이렇게 운영해요.
―강아지랑 산책 나왔다가 들어왔는데 밖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서 차를 마셔도 될까요?
―그럼요!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얼굴이 어두워 보여요.
―그래요? 글쎄요, 오늘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사장님은 마음이 힘든 사람 같아요.
―제가요? 왜요?
―늘 웃고 있는데 불안해 보여요.
―정말요? 진숙씨 눈에 제가 그렇게 보여요?
―네. 실례되는 말이었으면 죄송해요.
―아니에요. 진숙씨가 보고 있는 제 모습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몰라요. 이런, 들켰네.
―지역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사업에서 농인들이 베이킹을 배워서 자립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제가 거기에 참여 중이거든요. 오늘 만든 머핀이에요. 드셔보세요.
―고마워요. 답례로 커피는 제가 대접할게요.
―저는 언어랑 청각장애가 있으니까 늘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좋은 점도 있어요.
―뭔데요?
―살다 보면 듣고 싶지 않은 말들도 있을 텐데 안 들리니까요. 말은…,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 목소리도 안 들리니까…, 그냥 그래요.
―진숙씨는 사람의 마음을 보는 아름다운 눈을 가졌어요. 아주 좋은 능력이죠.
―제가요?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좋은 말만 듣는 것도 아니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예쁜 말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보이는 눈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같은 걸 보는 게 아닌 것처럼요. 진숙씨는 제 마음을 보잖아요.
―음, 생각하게 만드는 말 같아요.
마음을 나누는 데 꼭 말이 필요한 건 아니다. 진심을 담은 글자가 전달하는 마음이 때론 더 크게 뇌리에 박힐 때가 있다. 윤희는 노트를 한 장씩 넘겨 보며 진숙에게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 생각났다. 윤희는 노트의 마지막 장에 고백하듯 썼다.
―듣지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사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미안해요, 이런 말은 정말 실례인데…, 그런데 궁금해요. 그 세상은 평화로운가요? 내가 살아 온 세상은, 누군가가 나에게 온갖 쓰레기를 들이붓는 느낌이었어요.
어쩌면 윤희는 본능적으로 이 공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쓰레기통이 된 듯한 자신을 보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