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는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일그러진 얼굴을 펴내지 못하는 엄마와 웃으며 작별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자고, 그리고 자주 연락하거나 보지는 말자는 말도 덧붙였다. 저녁노을이 사위어 가는 길을 걸어 인왕산 중턱의 초소 책방으로 향했다. 평일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카페는 한가했고 윤희는 창밖을 마주하고 앉아 길어진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윤희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괴롭히던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문득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눈물이 눈에 고였지만 뺨을 타고 흐를 만큼 더 나지 않고 그대로 눈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긴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을 겪으면서 윤희는 피폐했던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잘 붙들고 있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잘 버텨주어 고맙다고 되뇌었다. 윤희가 복잡했던 생각과 상념에 빠져 지난날을 접어내고 있는 사이에 밖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윤희는 급격한 피로와 허기를 느꼈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대추차와 작은 약과 두 알이 전부였다. 카페에서 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서촌 골목의 초입에 있는 메밀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요기를 해결하고 집으로 가려던 생각에서였다.
“어서 오세요. 어?”
종업원이 인사를 하다가 윤희를 보고 멈칫한다. 지원이었다. 윤희도 지원을 알아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마음 사장님 맞으시죠?”
지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와 자리를 안내하면서 물었다.
“네, 여기서 일해요?”
윤희가 뜻밖의 만남에 반가운 듯 지원과 눈을 맞췄다.
“일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여기서 사장님 만나니까 신기해요.”
“그래요? 그래도 자주 봐서 그런지 저는 아주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 같은데요?”
지원이 웃었다. 마음의 첫 손님으로 지원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이었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따뜻한 메밀국수로 부탁해요.”
지원이 윤희의 주문을 받아 돌아서는데 가게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윤희가 몸을 돌려 뒤를 봤다. 메모를 남기고 다시 찾아왔던 그날 저녁과 같은 차림을 한 태수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눈이 커졌다. 태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얼굴에 달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피식 웃으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윤희가 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수 앞으로 메뉴판을 내민 지원이 미처 묻기도 전에 주문을 마쳤다.
“이 숙녀분께서 주문한 것하고 같은 걸로 주세요!”
윤희는 능청스럽고 시원시원한 태수의 태도에 그날처럼 큭, 하고 웃음이 났다. 태수는 얼굴을 붉히며 지원이 가져다준 메밀차를 컵에 따라 윤희 앞으로 두었다.
“우연이 벌써 두 번 겹쳤네요.”
태수가 메밀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태수의 생글거리는 맑은 웃음에 윤희는 급격히 몰려왔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대뜸 자기소개를 하고 명함을 내밀고 돌아서던 태수의 뒷모습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던 그날과 다르게 윤희의 마음이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네요.”
“일부러 며칠 동안 마음에 안 갔어요.”
“왜요?”
윤희는 태수가 따라 준 메밀차를 마시려다 물었다.
“공간을 만들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유쾌한 말투였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심지가 있는 말이었다. 윤희는 딱히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때마침 지원이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메밀국수를 가져왔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와 맛있어 보여요.”
먹음직스럽게 담긴 국수 그릇을 보자 뱃속이 휑하게 허기가 다시 몰려왔다. 윤희는 수저를 들고 국물을 떠먹으며 말했다.
“일단은 우리 맛있게 먹죠.”
“우리…, 요? 네! 우리 맛있게 먹어요!”
윤희가 별 뜻 없이 내뱉은 ‘우리’라는 말에 유별나게 반응하는 태수에 윤희는 메밀 면발을 후루룩 들이켜 삼키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윤희는 밥을 먹으면 항상 체기가 느껴져 먹는 것조차 괴로웠는데 모처럼 마음 편안한 식사를 했다.
“메밀 좋아하세요?”
식사를 끝내고 국숫집을 나와 커피를 사 들고 광화문 광장을 가로질러 나란히 걷는데 태수가 대뜸 물었다.
“음, 대체로요.”
“오월에 제주에 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메밀 꽃밭을 볼 수 있어요. 그 속에 들어가면 꼭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태수는 핸드폰에서 무언가 찾는 것 같더니 사진 한 장을 윤희에게 보여줬다. 화면 가득 하얀 메밀꽃들이 마치 푸른 밭 위에 팝콘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세 번째 우연이 겹치면 제주에 메밀꽃 보러 가지 않을래요?”
윤희는 자신보다 키가 큰 태수를 올려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과감한 표현을 하는 태수가 윤희는 궁금해졌다. 마음이 시키는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려 담아내는 사람들이 윤희는 늘 신기했다. 말이 없는 윤희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태수는 이어서 말했다.
“병원에서 내원자들을 상담하다 보면 대부분 우울하고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해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입으로는 죽음을 말하지만, 병원에 제 발로 찾아와 의사를 만나고 있잖아요. 삶에 대한 의지가 있는 거죠. 제가 그런 사람들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윤희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태수의 눈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수가 윤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맞추며 묵직하게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윤희는 의외의 대답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냥 그 사람의 말을 들어줘요.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때도 있잖아요. 부정하기보단 감정을 공감해 주는 게 상대방에게 힘이 되거든요. 그게 왜 힘들어요, 그건 틀렸어요,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라는 식의 말은 타인의 인생에 부정적으로 간섭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감정은 틀린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건데 다른 사람의 기준은 필요 없죠. 물론 의사로서 환자가 어느 기준을 넘어서 너무 불안해 보일 때는 다르게 대처하지만.”
윤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 건강한 일이에요. 먼저 내 마음이 어떤 말을 하는지 잘 들어보는 게 중요하고요. 윤희씨가 조용한 카페를 운영하시는 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역시 의사 선생님이라 다르네요.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매일 말하고 듣는데, 정작 자기 자신과 대화는 안 하니까요. 저도 그랬고요. 제 마음이 하는 말에 집중하고 싶어서, 순전히 제 욕심으로 그렇게 만들었어요.”
윤희가 씨익 웃었다. 태수는 수채화처럼 옅게 번지는 윤희의 웃음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잠깐 앉을까요?”
태수가 광장 가장자리에 꾸며진 정원 벤치를 가리켰다. 둘은 걸음을 옮겨 나란히 앉았다.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 되잖아요.”
태수는 다시 장난기 섞인 유쾌한 말투로 돌아왔다. 말의 무게가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를 오가는 태수의 모습에 윤희의 실소를 터트렸다.
“그거 말을 그냥 갖다 붙이는 거 아니에요?”
“어휴, 아니에요. 우리 둘만 봐도 그렇잖아요. 우연이 두 번 겹치니까 이렇게 포근한 봄날 밤, 함께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잖아요. 메밀꽃 꽃말이 뭔 줄 아세요?”
“글쎄요. 뭔데요?”
윤희는 태수의 능글맞은 말투에 웃음을 참으며 되물었다.
“연인.”
푸하, 연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모든 일의 시작에는 서사가 있다. 태수는 윤희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서사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리 내 웃는 연희를 보고 태수는 민망한 듯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 그래서요?”
“음, 그러니까, 말이죠.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 되고, 인연이 계속되면…….”
태수가 잠시 말을 멈추고 차분해졌다.
“인연을 뒤집어서 연인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저, 괜찮은 사람이에요.”
연희는 여전히 웃음의 여운이 담긴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윤희에게는 상대에 대한 호감이나 남녀 간의 사랑 따위의 감정은 늘 피상적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확신을 가져본 적도 없을뿐더러 늘 허공에 부유하듯 떠다니는 상태로 지금껏 살았다. 윤희는 대답 대신 헛헛한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보았다. 태수는 그런 윤희를 보고 함박꽃처럼 활짝 웃었다. 마음이 가득 찬 사람만이 가진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서 발현되는 그런 특유의 분위기가 태수의 웃음에서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