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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Nov 14. 2024

과거의 상처에 매몰된 나를 내가 아는 일은 어렵다

알아차림

 요즘은 TV 매체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대상의 마음 상태를 분석하고 현 상태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환경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되짚어가는 상담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른, 아이, 부부 등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 기본은 모두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각하기 위해 스스로 관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인지적 변화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모두가 내가 주체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하지만 되묻고 싶다.

 진심으로 그러한가?

 살기 바쁜 ‘오늘’에 치여 상처받은 ‘어제’의 나를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익숙한 관념으로 그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의 상처 따위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치부하면서도 버리지는 못하고 애써 외면하고 묻어두는 건 아닌가.

 환부를 치료하지 않고 아문 상처는 결국 곪기 마련이다. 자신의 상처를 중간중간 들여다보고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는 일에는 왜 그렇게 소홀한가.

 우리는 신체적 통증에만 대체로 반응한다. 고열에 시달리거나 살갗이 찢어지고 피를 봐야 그제야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처방받은 약을 먹는다. 그에 반해 내면의 통증에는 무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내면의 상처 치료에 소홀히 한 대가는 썩은 살을 도려내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는 건지, 무슨 일 때문에 힘든 건지, 과거의 어떤 일이 현재의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 건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래야 진짜 ‘내’가 ‘나’로서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내가 힘들고 불행하다고 느끼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 그런 모호한 상태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이런 일이 생기는 건,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하고 ‘오늘’의 ‘나’에서만 문제를 찾으려 기 때문이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나 자신을 소중히 돌보기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특히, 기질적 성향이 HSP인 사람은 자신이 HSP 부류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삶의 후반부의 삶의 행로를 그나마 현명하게 가꿀 수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언급했던 듯, HSP는 유전학적으로 부모의 기질을 물려받기 때문에 본인이 HSP라면 자녀도 그 기질을 타고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양육자로서 자신의 아이가 HSP의 기질이 있는지 관찰하여 양육 자세를 아주 세심하게 바꾸고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기질을 잘 알고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보태자면, HSP 기질을 가진 사람의 상대 배우자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무난한 사람이 적절하다. 작은 일에도 예민해지는 HSP의 곁에 반대 성향인 사람이 함께하면 대체로 적정선에서 융화되는 효과가 있다. 예민하고 민감한 배우자의 성격을 둔감하게 느끼는 사람이어야 불화가 적고 HSP 당사자의 예민함도 느슨해진다. 반면, 부부 모두 HSP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의 성향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겠으나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아주 많은 시간을 들이고 아주 높은 수준의 인내심을 갖춰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두 사람 모두 예민한 신경 가지고 있는데, 각자가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낮으면 상대를 배려하기까지는 모든 일상 순간이 불협화음이다.      


 나르시시스트 엄마(과도한 자기애 소유자, 권력자)와 그런 그녀의 플라잉 몽키(추종자) 역할을 했던 딸이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독립을 가장한 가출을 감행해 무너진 내면을 치유하는 여정을 그린 나의 단편 소설이 우연한 기회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종이책 몇 권을 보내줘 내 방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어느 날, 식탁 위에 책이 놓여 있었다. 엄마가 읽은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는 한마디 했다.

 “세상에 그런 엄마가 있나? 딸이 안쓰럽더라.”

 물론 소설의 내용이 허구를 바탕으로 하지만, 소설의 내용 중에 엄마의 모습을 빌려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엄마의 짧은 서평을 들은 내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역시 인간이란 자기 객관화가 어려운 존재다.

 자기 자신의 객관화를 통하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하는 마음이 자연스러워야 진정으로 나에 대한 ‘앎’이 시작된다. 남들은 좋다고 하는 부분이 나는 뭔가 불쾌하고 거부감이 든다면 내면의 방향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와 맞지 않는 것이고 그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나를 위해 멈출 수 있어야 한다. 내면의 소리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모든 육체적 활동을 무의식적으로 행하지만, 그것도 결국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건강한 움직임은 과거에 매몰된 나를 건져 올렸을 때 가능하다. 내가 원하는 것, 생각하고, 느끼는 그 강력한  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이 선행되지 않은 채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 모든 육체적 움직임은 멈추려 든다. 그리고 그때 우울증이나 번아웃과 같은 마음의 병이 찾아오는 것이다. 나의 상태를 ‘알아차림’ 할 수 있는 감각을 기르면 자신의 삶을 보다 더 평온한 상태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래야 진짜 내 마음과 내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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