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참 오묘하다. 눈으로 보이는 외형의 형태가 없기에 그 크기도, 상태도 알기란 매우 어렵다. 사람마다 각기 가지고 있는 감정의 흐름도 복잡 미묘하거나 단순하거나 급격히 파고를 그리거나 변수가 다양하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밑바탕이 되는 상호작용에는 상대의 감정을 미루어 짐작하고 이해하는 ‘공감’이 중요하다.
공감은 ‘감정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주로 상대의 감정에 비중을 두고, 후자는 상대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 그리고 해결 방안에 비중을 둔다. 인간은 이 두 가지 공감 능력을 지니지만 성향이나 기질적인 측면에 따라 어느 것에 비중을 두고 쓰느냐에 차이가 있다. 무슨 일이든 중도(中度)의 선을 지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그 중간의 균형을 잡는 일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두 가지 공감 능력을 얼추 비슷한 비율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감정 조절 능력이 탁월한 사람일 것이다.
남들보다 감각 회로가 세밀한 HSP는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뛰어난데 안타깝게도 뛰어나다 못해 일정 선을 넘어서 ‘과도한’ 감정적 공감을 한다. 타인이 겪은 불의를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상대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신이 경험한 듯이 체감하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느낀다. 인지적 공감의 측면이 부족함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감정이 자신을 옭아매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감정 통제권을 그대로 내어준다. 타인과 자신의 감정을 분리하지 못한 그 대가는 혹독하다. 사소한 감정 변화에 삶의 전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타인의 문제에 공감을 넘어 자신의 문제처럼 해결하려 들며 그렇게 타인의 삶을 산다. 알맹이는 쏙 빠진 빈 껍데기로 미세한 감정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 채로 사는 것이다. 그 타인이 친구, 지인, 가족, 부부, 자식 등 가까울수록 이런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기 어렵다. 자신을 위해 써야 했을 그 에너지와 시간을 몽땅 타인을 위해 소모한 인생을 살아온 그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그 텅 빈 ‘자아’의 정서적 공허함에서 오는 심리적 괴로움의 고통으로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부메랑이 된다.
HSP는 타인과 자신의 감정을 분리하고 생각을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장애물을 설정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눈에 보이는 물건(핸드폰이나 커피잔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을 상대와의 사이에 두고 물리적 거리의 경계선을 만드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이 내가 설정한 그 선을 넘어서 내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방어막인 셈이다. 이것은 타인의 감정을 습자지처럼 빨아들이는 나의 문제를 자각한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제어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정말 신기하게 나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이전에는 누구의 감정인지도 모를 것에 압도되어 우느라 인지적인 판단이 어렵고 그 감정이 오래 갔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설정한 그 방어막 너머에서 감정을 끊어낸다. 단절이 아니다. 나의 감정을 다뤄내기 위해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남의 감정은 일정 부분 걸러내는 작업이다. 나는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 이 과정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나의 타고난 기질적인 부분과 강박적인 성향을 일정 부분 깨부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은 힘에 부치고 고통스러웠으나 남은 나의 삶을 위해서는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감정을 필터 없이 쏟아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지 못하고 거친 말투와 일그러뜨린 표정, 힘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듯 몰아붙이는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직장 상사나 부모, 형제거나 설사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이들의 감정에 휘말려 나를 갈아 넣는 일은 어리석다.
타인은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상대가 주더라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감정에 스위치를 달고 켜짐과 꺼짐의 상태를 내가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