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겨운 사랑

취업 면접 : 역겨운 사랑의 고백

by 유주임

3월, 4학년 막 학기, 코스모스 졸업 그리고 상반기 공채 시작.


일단은 대기업 위주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습니다. 왜냐면 딱히 어디를 갈지 모르겠거든요. 남들 하는 거 맞춰서 학점도 겨우 맞춰놓고, 어학점수도 맞춰놓고, 대외활동이다 사회봉사다 뭐다 제기랄 일단 할 수 있는 지랄은 다 했다 이겁니다. 근데 딱히 지원하고 싶은 열망이 드는 부서가 없어요. 부서는 무슨 염병, 기업도 모르겠는데. 마치 마트에서 장 보는데 무슨 요리를 할지도 모르면서 괜찮아 보이는 재료를 막 카트에다가 쳐 넣은 느낌이랄까. ‘뭐 일단 사놓으면 언제든지 쓰겠지’ 하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유통기한 2년”이 지나버린 어학점수는 썩어 문드러진 양파처럼 쓸 수조차 없어요. 만져 본 적 있어요? 썩은 양파?


‘취업 지원서 달력’이라는 게 있습디다. “모 기업 언제부터 지원 가능, 언제 마감.” 이런 거 쓰여 있는. 1학년 때 1.0점대 학점으로 학사경고를 받은 죄로, 그 후 4학년 1학기까지 매 학기 21학점 전공 들으며 겨우 졸업학점을 맞춰왔어요. 그 결과 이번 학기는 이틀만 학교를 가게 되어 너무 좋았는데, 이제는 저 달력에 맞추어 생활을 하고 있네요, 이건 뭐 매일이 중간고사 기말고사야 시험이야 젠장.


스펙이야 그렇다 칩시다. 이거 뭐 지원하는 곳마다 자기소개서를 달래요. 모든 문항 다 합치면 3,000~4,000자도 훨씬 넘는 양의 자소서를. 그것도 역경을 이겨낸 나만의 스토리로 말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역경이라곤 공중 화장실에서 큰 일 보고 휴지가 없던 일밖에 없는데. 쓰다 보면 자소서인지 자소설인지, 이 기세로 판타지 소설을 썼으면 조앤. K. 롤링 작가가 같이 일 해볼 생각 없냐고 한국까지 날아왔겠습니다.


무념무상 자소서를 쓰고 있으니, 문뜩 취업이랑 고백이랑 비슷한 관계라는 생각이 듭디다. 어제는 H 그룹, 오늘은 E 그룹, 내일은 S그룹. “나 좀 봐주세요, 나 좀 뽑아주세요, 난 엄청 유능한 남자입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할 자신이 있어요, 난 어렸을 때부터 당신을 사랑해왔어요.” 매일 다른 회사에다 지원하는 모습이 마치 매 순간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아 나 자신이 역겹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엔 괜찮은 회사가 많듯이, 괜찮은 여자도 꽤 있을 겁니다. 못 만나봐서 그렇지.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사랑한다’라는 말은 말입니다, 딱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거든요, 이 세상에 딱 여자한테만 말입니다. 여자 친구 옆에 앉혀두고, 지나가는 다른 여자한테 사랑한다고 말해보세요, 뺨 맞을 용기가 있다면. 진짜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그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는 것,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것, 그 여자가 아프면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것, 뭐 그런 게 진짜 사랑 아닌가요? 제가 아직 너무 순박한 겁니까? 이 글을 읽는 그대들도 ‘이거 아직 사랑을 잘 모르는 애송이 로맨티시스트 구만’ 이라며 혀를 차고 있습니까? 아 왜, 그대들도 드라마에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보면서 ‘아 저게 진짜 사랑이지, 저런 남자, 여자 어디 없나 ‘ 하잖아요.


몰라요, 그냥 내 생각은 그렇다 이겁니다. 그래도 뭐 일단, 먹고살아야 사랑도 할 수 있으니, 최종 지원하기 전에 17번째 수정하고 있는 망할 지원서 진짜로 제출하러 갈래요. 뭐 괜찮은 회사겠거니 하고.

아, 자기소개서를 이렇게 스토리 있게 쓰면 좀 좋아.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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