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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Jun 30. 2023

사막에서

단편소설

기계들이 일으킨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새 전쟁이 시작된 시대, 마지막 남은 저항군의 기지를 찾아 병사 한 명이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블레어였다. 시간은 한여름의 오후였는데, 핵전쟁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구조물과 생명들을 녹여버리겠다는 듯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해가 지기 전 기지에 닿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기지로 가는 길 도중에 보인다는 소문 속의 오아시스에 닿을 수만 있다면, 충분한 물과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블레어는 이 생각만을 머릿속에 담은 채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듯한 사막을 걸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걷고 있었는지는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져 희미해졌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블레어는 사막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 처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을 걷는 도중, 갑자기 총성이 울려퍼졌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들렸기에 블레어가 몸을 완전히 숙이기도 전에 자신의 왼쪽 어깨를 스치는 날카로운 총알을 감지했다. 상처를 확인할 틈도 없이 블레어는 재빨리 모래 위로 엎드려 주위를 살폈다. 곧, 저 멀리 총을 든 회색 형체가 포착되었다. 블레어를 향해 걸어오는 그 형체는 기계가 분명했다. 블레어가 몸을 숙이는 모습을 보고는 총을 맞고 사람이 쓰러지는 것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사막이나 버려진 도시의 기계는 보통 오래되고 낡은 개체였다. 망원경을 사용해 기계를 자세히 살펴보니 움직임이 뒤틀리고 이상했다. 낡은 개체가 오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블레어는 기계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고, 기계의 머리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기계의 낡은 회로와 금속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명중이었다. 블레어는 곧바로 일어나 다시 주위를 확인하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방해물을 하나 처리했지만, 앞으로 어떤 뜻밖의 위험요소들이 나타날 지 몰랐다. 전쟁을 살아남아 진화한 전갈과 늑대들, 그리고 인간과 기계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부랑자들이 나타나는 밤 전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하늘에 걸린 해가 블레어를 따라오며 열기를 비추었다. 어느새 태양은 지평선에 가까워져 있었다. 블레어보다 태양이 먼저 하루의 여정을 마칠 지도 몰랐다. 태양이 고개를 완전히 숙이기 직전, 먹구름이 하늘을 채우더니 천둥이 울려퍼졌다. 비가 한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했고, 블레어는 헬멧을 벗었다. 열기와 습기로 땀에 젖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헝클어진 검은 머리가 드러났다. 충분히 오아시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빗물에 젖어서 진흙이 되어버린 바닥을 밟으며 블레어는 오아시스를 향해 나아갔다.


오아시스에 마침내 도착한 블레어는 답답했던 슈트를 바닥에 벗어 던지고 물에 발목을 담갔다. 그리고는 속옷까지 벗고 오아시스에 완전히 몸을 담갔다. 비를 맞으며 물속에 잠긴 블레어는 사막을 걸어오며 쌓인 열기와 피로를 깨끗하게 씻어냈다. 블레어가 몸을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아시스가 파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미소를 짓고 눈을 감았다. 기분 좋게 미소를 지은 블레어는 그 순간 사막에서 입은 상처를 떠올리고 자신의 어깨를 살폈다. 블레어의 찢어진 상처 사이로 은빛 금속 피부와 기계장치들이 보였다. 기계들의 에너지원인 파란 액체도 상처에서 스며나오고 있었다.


같은 편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블레어는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 오작동한 기계를 탓했다. 하지만 인간의 피부와 얼굴을 씌운 상태이니 낡은 개체는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일 인간 저항군의 기지로 가서 이 상처를 보이지만 않으면 됬다. 오아시스에서 블레어는 눈을 감고 머릿속을 집중했다. 기계들에게 잡혀서 그들의 스파이로 개조당하기 전,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인간의 의식이 깨어나서는 안 됬다. 블레어는 완전한 기계에 비해 빈약하고, 물과 음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몸을 탓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에 의심 없이 숨어들기 위해서는 바로 블레어와 같은, 인간과 기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가 필요했다. 블레어는 차갑고 인공적인 힘으로 자신의 안에 남아있는 인간을 억누르며, 비가 그치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까지 오아시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태양이 다시 사막을 비추자 블레어는 다시 조용히 일어났다. 옷을 다시 갖춰입은 그녀는 이제 인간들의 마지막 기지로부터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블레어는 희미하지만 기계적이면서도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기지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기계들이 블레어에게 심은 검고 사악한 임무가 무엇인지는 베일에 쌓여 있었지만, 인류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인 것은 분명했다. 금속과 기계 사이에 갇혀 잠든 인간 블레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녀는 제 시간에 깨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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