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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Jun 30. 2023

영원히 어린아이

판타지 단편소설

"We will never be children again".

우리는 이제 다시는 아이가 될 수 없다. 오두막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 글귀는 석지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새로운 글귀가 새겨지고 곧 이제까지 머리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진정 느끼지 못하였던 진실이 드러났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잘 보냈는가? 석지는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이 바짝 뜨이고 정신이 마치 각성되는 것 같은, 흥분감과 불안감 사이 어딘가에 걸친 감정이었다. 석지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오두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신발조차 깜빡하고 맨발 그대로 부드럽지만 투박한 흙과, 그 사이로 조금씩 일부를 드러낸 풀들을 느끼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석지는 호수로 향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 호수에서 생각 없이 놀던 도중 겪었던 잊지 못할 경험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린 석지는 발목까지 물에 잠길 정도로 호숫가에 들어가 수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지는 거울과 같은 수면 위로 무언가를 보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짧지만 행복한 나날들이 수면 위에 비친 것이다. 수면 위 물결 때문에 조금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 사이로 과거 기억들의 이미지 뿐 아니라 그 당시의 감정과 기분까지 생생히 재현되는 듯 했다. 시간이 지나 호수를 잊어버리기 전까지, 석지는 어떻게 그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답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호수의 마법의 비밀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호수가 다시 한번 자신의 과거를 되샬려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바싹 마른 입안에 침을 짜내면서, 석지는 드디어 호수에 도착했다. 호숫가 주변의 풀과 꽃들의 모습이 달라졌지만 분명 어린 시절의 그 호수였다고 석지는 확신했다. 사소한 차이점들을 넘어서 호수의 넓고 고요한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호수는 이번에는 잔물결 없이 너무나도 맑았다. 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분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듯 했다. 이런 호수의 유혹에 넘어가듯, 석지는 천천히 걸어갔다. 유리그릇과도 같은 호수에는 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호수 가장자리 풀가지까지 모두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을 호수라는 접시에 담아 낸, 석지를 위해서만 준비된 특별 요리 같았다. 더 가까이 오라고 호수가 손짓을 하는 듯 했다. 석지는 호숫가에 잔물결이 일어서 물에 담긴 완벽한 세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호수에 발을 담그는 대신, 물과 땅이 맞닿은 경계에 손을 짚고 호수 안쪽으로 머리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자연이 준비한 캔버스에, 머릿속 기억들을 물감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겪어온 크고작은 순간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그 순간들 중에서 석지가 더 큰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들은 나머지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 사소한 것들, 우울하고 부정적인 기억들은 점점 사라져 갔다. 석지의 얼굴에 바보같은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이 순간 석지의 흥분된 감정도 호수 위로 쏟아져서, 행복한 기억들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석지는 자신이 아직 땅을 짚고 있는지, 호수 안으로 들어왔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행복의 역사가 뒤틀림 없이 보여지고 있었으나, 무엇인가 자신의 몸과 정신을 휘감는 듯 했다. 호수의 신비하지만 차가운 물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어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이런 질문들이 석지의 머릿속에 잠시 피어올랐으나 곧 극도의 행복감이 그런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을 침묵시켰다. 석지의 내면은 호수의 표면과 일치되어 아름다운 그림으로 꽉 차게 되었다. 석지가 호수를 응시할수록 호수도 석지를 점점 집어삼켜 갔고, 곧 호수 바깥에서 석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며칠 전 성년이 된 석지는, 떠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어른이라는 길은 너무 우울했다. 아이의 길을 걸어오면서 느꼈던 행복, 흥분, 열정들은 마음속의 불꼿처럼 타올랐고, 샘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어른이 된 이 순간 불꽃은 꺼지고 샘은 매말랐다. 석지는 고개를 돌려 과거 어린아이로서 걸어온 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영원히 자신의 뒤를 바라보게 되었다.


석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그의 기억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호수 아래에 숨쉬며 살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밤이 되면 수면 위로 올라와 찬란히 빛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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