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untitled

심해의 노래

by xhill


푸른 바다는 붉은 어둠에 서서히 젖어가고 있었다.





물속을 수놓는 그림자와 희미한 햇빛을 가로지르며 무언가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태양의 손길과 생명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차갑고 외딴 바다, 낡은 망토만을 두르고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그것은 마치 바다의 유령과도 같았다. 유령이 헤엄치는 이곳은 바깥 바다로부터 격리된 우울하고 외로운 바다였다.




거대한 얼굴과 팔과 손, 몸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바위 구조물들을 지나, 바다의 유령은 눈에 띄는 구조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황무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유령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헤엄쳤다. 간신히 들어오는 햇빛과 외딴 바다의 우울함이 만나 희미한 푸른색이 되어 지평선과 바위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곳에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가로지르던 유령은 어느덧 거대한 절벽의 끝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절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누구도 알거나 가보지 못한 심해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절벽이었다. 물속을 둥둥 떠다니면서, 유령은 예전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대신 천천히 절벽의 끝자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령은 머뭇거리거나 멈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곳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이곳에 온 뚜렷한 목적을 가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안개가 자욱이 깔린 심해로 향해 얼마 내려가지 않아, 유령은 절벽 바위의 어딘가에 멈춰 섰다. 유령을 덮고 있는 낡은 망토는 더욱 짙어진 바다의 푸른색과 섞여 들어가 회색의 빛깔을 내고 있었다. 망토 사이로 절벽에 새겨진 무언가를 바라보는 유령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유령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낸 듯했지만 흥분이나 열정, 환희 같은 강렬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예전처럼 차가움과 우울함만을 뿜어 내며 이미 적막한 바닷속을 어둡게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유령의 앞에는 거대한 무언가를 새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크기는 어마무시하지는 않지만 시야에 간신히 들어올 정도의 크기였으며, 누가 언제 그렸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벽화였다. 바위에 새겨진 문양과 색깔들이 조금씩 희미해진 것으로 보아 수많은 세월 전에 새겨진 듯했지만, 벽화에서는 알 수 없는 공포, 형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심이 함께 새겨져 있는 듯했다. 벽화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수많은 문양과 선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복잡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때문에 이를 단순한 낙서나 자연적으로 생겨난 문양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바라보던 유령의 망토 사이를 비집고서 가느다란 팔 한 쌍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팔찌를 낀 하얀 팔은 망토를 서서히 끌어내리고 집어던졌다. 망토는 곧 유령에게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심해를 향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벗겨진 망토 아래로 은빛 꼬리를 흔들며 물속을 마치 하늘인 듯 둥둥 떠다니는 인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팔찌 외에도 금속으로 만든 장신구와 옷을 입고 있었다. 왕관을 쓴 이마 뒤쪽으로는 기다란 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으며, 아틀란티스의 문양이 새겨진 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 등의 보석은 낡은 망토를 쓰고 있던 유령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고귀하고 우아한 인상을 인어에게 부여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그녀였지만 회색과 짙은 파란색의 바다에서 생기를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파란색을 가진 눈동자는 더 이상 빛나고 있지 않았으며, 금발 머리카락과 은빛 꼬리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보석을 수놓은 듯 반짝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마치 죽은 자의 그것을 보는 듯, 차갑고 공허할 뿐 아니라 소름 끼치기까지 하는 인상이 느껴졌다.




그녀는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인어는 귀걸이를 귀에서 떼어낸 다음 목걸이 역시 마찬가지로 풀어헤쳐 바다 아래로 흘려보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망가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왕관을 벗어냈으며, 뒤이어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었다. 갑옷 아래에는 분홍색 조개껍데기로 만든 브래지어가 봉긋한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강렬한 갑옷 아래로 드러난 어깨와 몸, 배 등은 가느다랗고 마른 모습이었다. 몸에 걸치고 있던 쇳덩이를 모두 제거한 그녀는 동화 속 인어공주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인어공주는 벽화를 다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초점이 풀리고 생기가 없는 그녀의 눈동자 뒤편,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감정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은 분명했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가, 등 정중앙에 묶여 있던 조개껍데기 브래지어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끈의 매듭은 어렵지 않게 풀렸으며, 곧 분홍색 조개 브래지어 역시 다른 장신구와 옷감처럼 심해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어공주는 외딴 우울의 바다, 알 수 없는 벽화 앞에서 알몸이 되었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버렸지만 아직 남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인어공주는 허리춤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은 칼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칼을 빼내들자 죽은 자처럼 미동이 없던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감정의 동요가 희미하게 몰아침이 드러났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손목을 내민 다음, 칼을 이용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상처를 냈다. 그녀를 죽일 만한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지만 칼날이 지나간 자리가 벌어지고, 곧 붉은 피가 희미하게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인어공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 인기척도, 생명의 흔적도,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바다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어공주는 동화와 우화에서 전해지는 모습처럼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아닌, 꺼져가는 불꽃처럼 연약하고 구슬픈 목소리로 작게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는 주문이나 독백에 가까운 것처럼 들려왔다.






‘나는 바다에 푸른색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낭떠러지의 끝에서 깨달았지



피를 흘리면 바다도 붉게 물들고



끝나지 않는 영원한 밤이 오면 그림자에 검게 물든다는 것을



아름답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꺾인 꽃들



피지 못한 꽃들의 보지 못할 아름다움을 담아



언젠가는 누군가 이 슬픔과 꿈을 들여다보기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인어공주의 가슴 중심에서 작은 빛이 나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더욱 크고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노래를 이어가자 그 빛은 인어공주의 가슴에서 위로 이동해 목을 타고 올라갔으며, 인어공주가 노래를 끝마치자 그녀의 입과 혀의 끝에서 작은 물방울처럼 떨어져 나왔다. 환하게 빛나는 빛은 어느새 작은 파란 구슬이 되어 있었다.




피를 흘리는 인어공주는 자신이 뱉어낸 파란 구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구슬을 손으로 감싸며 벽화를 향해 가져갔다. 절벽에 그려진 거대하고 알 수 없는 벽화, 그 중심부로 보이는 거대한 원형 형상으로 인어공주는 구슬을 가져갔다.




구슬은 벽화와 맞닿자 순식간에 환한 빛을 잠시 내뿜고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인어공주가 흘린 피 역시 작은 붉은색 회오리를 그리며 벽화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어공주의 구슬과 피가 들어간 절벽의 벽화는 예전보다 더 생생하고 뚜렷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그것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포감과 압도감 역시 더욱 커졌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인어공주는 더 이상 몸을 겨누는 것을 힘들어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꺼풀은 자꾸만 감겼으며, 천천히 움직이던 꼬리의 움직임 역시 더더욱 느려져 갔다.




이미 생기 없던 모습을 보이던 인어공주는 결국 잠에 빠져들듯,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벗어젖힌 장신구와 망토, 옷처럼 아래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은색의 꼬리는 어느새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인어공주는 조각이나 동상처럼 굳어버린 채, 더욱 빨리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파란 빛, 파란 구슬이 있던 인어의 가슴에는 공허한 구멍, 텅 빈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인어공주의 시신이 심해의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바다의 아래쪽 어딘가에서 외딴 바다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괴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벽화가 그려져 있던 거대한 절벽에 금이 가고,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괴성과 진동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절벽 아래, 심해의 어둠 어딘가에서 거대한 촉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완수했다. 자신의 목숨과 꿈,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심해에 잠들어 있던 그것을 깨운 것이다.




그것은 아틀란티스의 야욕으로 일어난 전쟁을 위해 아틀란티스의 마법사들이 내린 마지막 결정이었다. 그것을 깨우기 위해 이전에 희생된 수많은 인어들처럼, 인어공주 역시 자신의 어두운 운명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전쟁을 위해서….




더 어둡고 낮은 곳에 위치한 심해의 바다,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던 인어공주의 굳은 몸은 이곳에 멈추었다. 바윗돌과 해골들이 섞여 있는 이곳에는 오직 어둠만이 존재했다. 그 어둠 사이사이로는 수많은 인어들의 굳은 몸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눈이 없어진 인어의 시신, 손이 사라진 인어의 시신, 재가 되어 문드러져 가는 인어들의 시신은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꿈과 재능, 생명을 희생한 인어들의 묘지는 이제 영원한 어둠과 고요와 더불어 휴식만이 감도는 곳이 되었다. 인어들의 목숨을 대가로 풀려난 고대 바다의 존재들이 아틀란티스의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던, 바깥 바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이곳은 영원한 잠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곳은 꿈이 없는 영원한 안식처다.




인어들이 이곳에 잠들기 직전 불러낸 꿈과 의지는 노랫소리가 되어 그것이 지나간 이후의 새로운 바다를 계속해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탄생한 새로운 생명은, 그때까지도 남아 바다를 맴도는 인어의 노래와 메아리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the last night in 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