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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Aug 16. 2023

SIREN

판타지 단편소설 <세이렌>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숨쉬기가 어려울 때

죽음이 등뒤로 다가온 것 같을 때

그대를 구원하리라는 달콤한 노랫소리가

안개와 물방울과 파도 사이로 들려오더라도

그를 거부하고 의심하고 경계하라

그 노랫소리는 천국으로 가는 길문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내리막이니


- 고대 바다를 항해하던 선원들이 불렀다는 노랫소리



이 세상은 너무나도 광활하고 오래된 대상이다. 한 개인의 상상과 기억을 모두 초월할 정도로 말이다. 그 기억과 상상이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과거에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고 몇몇은 말한다. 육지, 하늘, 그리고 가장 깊고 어두운 바다까지......


에드는 얼마 전 가족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스트레스를 주는 골칫거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빽빽하고 오염으로 가득 찬 도시를 떠나, 상대적으로 자연에 친화적이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작은 마을로 가서 살겠다고 가족에게 그는 말했다. 물론 이러한 이유도 컸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요인은 마을을 둘러싸는 거대한 호수와, 그 호수에서 뻗어져 나오는 강줄기였다. 이 커다란 호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을 통해 멀리 떨어진 다른 호수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바다와도 연결되었다. 이 호수에는 오래 전부터 민담 하나가 전해 내려왔다.


- 바다에서 항해하는 선원들, 배고픔과 외로움에 빠지거나 폭풍우로 죽음의 입김을 온몸으로 느끼는 상황에 이른 선원들.. 세이 렌들은 그들을 자신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랫소리로 유혹한다. 선원들은 자신들이 가진 문제점, 외로움이나 죽음의 위기를 드디어 이겨내게 되었다는 희망감에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세이렌들은 곧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붉게 빛나는 눈을 드러내며 그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잡아 먹는다. 이런 사악한 세이렌들은 자신과 비슷하지만 선한 인어들과 거대한 전쟁을 펼쳤다. 고대의 바다에서 수백년의 시간 동안 펼쳐진 전쟁의 결과로 결국 인어들이 패배해서 그 수는 줄어들고 전 세계의 바다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


이 거대한 호수는 세이렌들의 목격담이 가장 많이 기록된 장소 중 하나였다. 자연의 고요함과 생명력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이런 전설의 일부가 깃들어 있는 곳을 에드가 재미있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민담을 믿지 않았다. 한때는 각종 신비로운 동물들에 관심을 가지며 자연과 세계에 동경을 품고 상상력을 기르던 아이였지만 이후 침울하고 눅눅한 삶을 겪으며 자연스레 그 동심을 잃은 것이었다. 도시를 떠나 호수의 마을에서 살기 시작하고 에드는 꽤 자주 호수를 탐험했다. 매일까지는 아니었지만 호수 주변으로 산책을 나갔으며, 매 주말에는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호수의 중앙까지 나아갔다. 에드는 이 과정을 시간 낭비로 여기지 않고, 자연과 친해지는 과정, 그 비밀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경건한 마음을 가졌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고 평범한 나날이 계속 지속될 것 같았다. 어느 늦은 밤 벌어진 사건 직전까지는 말이다.


평소와는 달리 에드는 알 수 없는 모험심이 들었다. 지금까지 똑같이 이어진 일상에 대한 지루함에 질려버린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모함과 호기심이 섞인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한밤중에 호수를 탐험하기로 결심했다. 초저녁에 호수를 탐험한 적은 있었기에 진정으로 새로움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을 택했다. 위험할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익숙해진 호수이기에 에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시계의 침이 새벽 네 시를 가리키자 조용히 집을 나섰다.


달빛을 받고 은은하게 빛나는 호수는 고요했다. 그 어떤 생물의 소리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오직 에드의 노가 만들어내는 물결만이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형상을 수면에 그려낼 뿐이었다. 에드는 앞을 밝혀줄 작은 전등을 가져왔으나, 달이 생각보다 밝게 빛났기에 전력을 아끼고 분위기에 젖을 겸 전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호수를 누볐다. 고즈넉하고도 고딕스러운 분위기와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에드는 순간 자신의 진짜 목적을 떠올렸다. 탐험하지 못한 곳, 해보지 않은 것들을 수행하는 것. 주위를 둘려보던 에드는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거의 가보지 않은 늪지대를 떠올렸다. 그쪽으로 시야를 돌린 에드는 호수의 가장자리에 음침하고 자리 잡은 늪지대의 나무들을 보았다. 그쪽의 물과 분위기는 이상하게 더욱 어둡고 축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드는 이 상황에 약간의 흥분감을 가진 채, 늪지대를 향해서 노를 젓기 시작했다.


늪지대에 진입하자 확실히 물이 탁하고 끈적해짐을 에드는 느꼈다. 하지만 노를 젓는 데 이상은 없었기에 그는 안심하고 계속 나아갔다. 머리 위로는 죽어가는 나뭇가지들이 회색 손길을 뻗쳐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사이로 하얀 달빛이 조금씩 들어와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에드는 약간의 으스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곳은 에드가 경험한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정확히 가리킬 수는 없었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뿜어내는 무엇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물속에서 무언가가 배를 때렸다. 주변이 워낙 고요했기에 그 소리와 진동을 에드는 분명하게 느꼈다. 물고기라기에는 너무나 둔탁하고 큰 진동이었다. 에드의 마음속에 마침내 공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는 거의 쓰지 않던 전등을 켜서 물 쪽을 비추었다. 에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에드는 여전히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죽음 같은 침묵을 깨는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에드가 있는 곳에서 분명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순간부터 에드는 완전한 공포감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드는 손전등을 배 옆쪽에 던지듯 놓은 다음, 허겁지겁 노를 젓기 시작했다. 갑자기 빠르게 노를 저으려니 팔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 계속해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드가 노를 저어 늪지대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랫소리가 갑작스레 끊겼다. 이 갑작스러운 고요는 에드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차가운 총알이 그의 몸을 뚫고 들어와 박히는 듯, 손이 떨리고 가슴이 뛰는 에드는 자신의 호흡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느꼈다. 노를 젓는 그의 팔에 쥐가 나기 시작했고, 불안이라는 이름의 숨막히는 촉수에 사로잡힌 그의 몸과 더불어 배는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에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호흡을 계속했다. 속도가 느려졌을지언정 노를 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달이 환하게 비치는 호수가 앞에 보였다.


그런데 달빛을 받는 호수와 늪지대의 경계에서, 갑자기 둥근 무언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이 떠오름과 동시에 달빛이 그 위로 정확히 떨어졌고, 에드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바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둠과 희미함 사이로 두 눈과 코, 입술이 드러났다. 이를 본 에드는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고, 에드와 함께 배도 수면 위에 멈추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에드는 그것이 사람의 얼굴을 가짐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말을 걸어 보려 하였다.


"저기.. 길을 잃었는데.." 떨리는 입술을 가다듬으며 에드는 몇 마디를 꺼냈다.


그 순간 커다란 충격과 함께 에드와 배가 공중 위로 솟아올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주변을 볼 새도 없이 어느새 배는 뒤집히고 에드는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수영을 어느 정도 하는 에드였기에 다행이지, 하마터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에드는 얼굴을 가까스로 물 위로 빼낸 다음 숨을 내쉬었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와 흐려진 수면으로 인해 눈과 귀가 가려졌다. 하지만 그 사이로 에드는 볼 수 있었다. 작은 점 같았지만 불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두 쌍의 눈을 말이다. 곧 눈들은 네 쌍, 여섯 쌍으로 늘어났다. 그것들은 에드를 중심으로 둘러싸는 듯했다. 심장이 멎기 직전인 듯한 에드는 가까스로 숨이 붙은 채로 배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빨간 눈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 눈이 달린 얼굴들, 가위같이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가느다란 채형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하반신은 기다란 꼬리를 하고 있었다. 세이렌들의 앞에 놓인 에드는 두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물길을 가르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에드가 실눈을 띄고 바라보니 분명 무언가가 저 멀리 물길을 가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수면 아래였지만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미한 빛을 내는 그 존재는 세이렌들과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대상이 점차 다가워지자 세이렌들은 고개를 일저히 돌렸고, 희미했던 빛이 갑자기 눈이 부시는 강력한 빛으로 바뀌었다. 하얀색과 파란색이 섞인 빛은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부셨으며, 그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소리와 열기가 느껴졌다. 에드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린 채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빛이 에드의 몸에 닿자, 에드는 그 온기를 느꼈다. 그 온기는 피부에 닿은 이후 어느새 에드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그의 마음을 가다듬는 듯했다. 에드의 호흡이 진정되고, 터질 듯 뛰던 심장도 제자리를 찾은 듯 했다. 작은 배의 튀어나온 옆부분을 쥐고 있던 에드의 손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약해지고, 주위를 둘러싸던 새빨간 눈빛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늪지대로 돌아왔다. 에드는 정신을 점점 잃지 시작했다. 마치 잠에 빠지려는 것 같았다. 에드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손이 배를 놓자, 그가 물에 빠지기 직전 약한 빛을 내는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잡아챘다.


자신의 몸을 간지럽히는 물길에 에드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가까스로 뜬 에드는 어느새 강가에 솟은 바위에 밀려와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자신의 왼쪽으로는 뒤집혔던 배가 놓여 있었다. 새벽이 끝나감을 알리듯, 어느새 하늘은 옅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곧 있으면 해가 뜰 것이었다. 에드는 자신의 몸을 확인하면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상처를 입은 곳은 없는 듯했다. 늪지대에서 벌어진 듯한 악몽과도 같은 사건은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사실 그것이 악몽이나 환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늪의 독성에 홀린 그가 물에 빠지고, 기적과 같이 이곳으로 떠밀려 왔다는 것. 하지만 에드는 곧 지난밤의 일이 악몽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시선을 바위 아래쪽으로 돌리자, 그곳에 엎드려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목에는 하얀 빛을 희미하게 내는 보석이 걸려 있었다. 어젯밤 세이렌을 쫓아낸 인어가 분명했다.


자신을 구해준 여인은 동화 속을 찢고 나온 듯, 인어 에리얼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짙은 빨간색으로 빛났으며, 가슴에는 조개로 만든 보라색 브래지어를 차고 있었다. 그녀의 하반신을 이룬 초록색 꼬리는 달빛을 받아서 은은하고 신비로운 듯한 색조를 띄었다. 에드의 눈을 의식하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에드는 이 모든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 장소, 이 호수는 어떤 곳이지? 에드는 말없이 바위에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나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옆에 놓인 배를 밀면서, 물과 진흙을 밟으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 마을과 호수에서 에드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똑같지 않을 것이었다. 에드의 마음속에서 신비한 생물들을 믿던 과거의 자신이 조금씩 되살아난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에드는 묵묵히 걸어갔다. 에드는 마음을 다잡은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전설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드가 돌아가는 모습을 여인은 멀리서 지켜보았다. 에드가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자, 여인은 그와 최대히 멀리 떨어진 쪽으로 헤엄쳐 갔다. 얼마 후 강가의 땅에 다다르게 되었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꼬리는 어느새 한 쌍의 다리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도록, 그녀는 몸을 낮게 숙인 채 덤불과 나무 뒤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그녀의 등 뒤로 태양이 어느 새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캐시였다. 이미 한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켜버린 상태였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꼬리를 다리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된 이후 마을에서 인간들의 옷과 모습을 하고 살아가던 캐시는 이 실수로 인해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없기를 기원했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세이렌의 존재와 그 전쟁을 진심으로 믿는 수는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마을의 가장자리, 외딴 자신의 집에 들어온 캐시는 문을 닫고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새벽 한밤중 갑자기 멀리서 들려온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서 곧바로 달려간 그녀는 옷을 정리할 틈도 없었다. 자신의 정체와 관한 문제 뿐 아니라, 세이렌들이 돌아왔음을 직감한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캐시는 좌절하지 않고, 책상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세이렌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알려야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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