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폭발로 탄생한 세상은 과연 폭발로 파멸하게 될 것인가
Dir. by Christopher Nolan
Starring. Cillian Murphy, Emily Blunt, Matt Damon, Robert Downey Jr. , Florence Pugh
(스포일러)
만약 모든 대사들과 상황들을 다 알아듣고 100% 다 이해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3막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다 신경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나.
역사 속 한 인간의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해 그의 개인적 삶, 그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창조물,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을 180분이라는 기다란 런닝 타임 동안 무섭도록 빽빽하게 쫓아간다. 마치 눈에 불을 키고 하나하나 따라가듯이 말이다. 양이 가득 찬 내용물이지만 절대 과도하거나, 반대로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다 기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하면 가장 잘 알려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에 걸맞는 핵폭탄의 탄생을 중심으로 해서 그와 연관되는 사건, 인물, 개인사, 그의 내면 등을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가면서 보여준다.
호흡은 굉장히 빠른 편이기에, 대사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절대로 지루하거나 느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명문과 명대사들도 곳곳에 박혀 있다.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는 놀란의 각본과 연출력 뿐 아니라 편집자 제니퍼 레인의 뛰어난 역량이 돋보인다. (본작 외 <테넷> <유전> 등의 편집을 담당). 거기에다가 <듄> 시리즈로 바쁜 한스 짐머를 대신에 놀란 전담 작곡가가 된 루드비히 고란손의 환상적인 음악까지 더하면 금상첨화. 장르가 액션물인 것도 아니고, 2차 대전 영화이지만 전쟁, 전투 장면은 눈꼽만큼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장르의 그 어떤 영화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영화적이고, 커다란 규묘의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놀란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들려줘야만 해서 만든 작품 같다. 전해져야 할, 그리고 전해들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수많은 대화, 장애물, 시간과 장소를 넘나드는 편집 사이로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들은 트리니티 실험 장면과 엔딩이다. 전자의 경우 음악과 연출을 통해 긴장감을 쌓아올리는 놀란의 능력이 극에 달한 장면이고 그 빌드업만큼 핵실험의 결과를 보여줄 때도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을 준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영영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듯, 장면은 보는이의 정신에 확실하게 각인된다. 실제 트리니티 실험이 인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 위에 각인된 것과 마찬가지로. 핵실험 장면 이외에도 강한 불빛과 침묵(고요), 그리고 귀를 뚫을듯한 강한 소리를 이용해 만들어낸, 숨이 멎을 듯한 장면들은 한 번만이 아니다. 영화 초반부터 오펜하이머가 보는 듯한 환영들을 통해 표현해낸 엔딩은 올해 최고 중 하나. 과학적 호기심에 빠져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보던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미지들과는 달리, 폭탄의 탄생과 그 미래를 미리 보는 듯한 충격적이고 암울한 결말의 비전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괴로워하듯 눈을 꽉 감는 오펜하이머.
리뷰 초반에서도 말했듯이 3막에서 1,2막 만큼의 몰입감이 안 나온 점은 아쉬웠다고 말했기에 완벽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볼 때는 어떻게 느낄지도 기대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훌륭한 영화이며 올해 최고작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우주가 빅뱅이라는 하나의 폭발로 태어났듯, 오펜하이머와 학자들이 만들어낸 폭발은 또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폭발로 탄생한 세상은 과연 오펜하이머의 두려움처럼 폭발로 파멸하게 될 것인가.
⭐⭐⭐⭐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