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hort sci-fi/fantasy story
블레어는 눅눅한 모래와 차가운 흙을 밟으며 길을 걸어갔다.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 위의 하늘에서는 태양이 내리쬐었지만 그것은 뜨겁고 눈부시기만 할 뿐이었다. 블레어가 걸음을 걷는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멀리서 높은 언덕과 산이 웅장하게 솟아올랐지만 그곳의 땅은 지금 블레어가 걷는 땅과 다를 바 없었다. 한때 숲이 거대한 요새를 이루고 다양한 생명들이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피워내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햇빛을 받고 자라날 동식물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태양은 땅과 흙을 뜨겁게 달구고 블레어의 몸에 땀을 맺히게 하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블레어는 아침에 해가 뜨기 시작하는 순간이면 그 따뜻한 촉감과 밝기를 좋아했다. 어두운 밤이 끝나고 빛이, 아침이 찾아온다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낮의 중심에 다다를수록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불쾌함과 지친 마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블레어는 모래와 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다. 블레어가 만들어낸 발자국들은 이변이 없는 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터였다. 머나먼 과거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미래, 세계는 황폐했다.
땅과 육지를 이루던 흙과 모래에서 동물과 식물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는지, 멸종하고 말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 숲과 생명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블레어가 이동하고 누비는 장소들에서 생명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육지를 차지하는 것은 마른 모래의 누런 빛깔과 회색의 경치뿐이었다. 동식물은커녕 자신과 같은 생존자들을 만나는 일 역시 흔하지 않았다. 인간들 역시 자신들의 실수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블레어는 얼마 남지 않은 인간 중 하나였다. 그녀와 같은 이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생명을 찾아 세계를 누볐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이 서로 만나거나 스치는 일은 적었다. 블레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마실 수 있는 물을 찾아, 과거가 미래에게 남긴 몇 안 되는 선물인 비상식량과 통조림 같은 것들을 찾아서 말이다. 블레어의 마음속에 피어 있던 꽃은 오래전 사라진 이후였다. 그녀는 시린 마음을 붙잡고 걸음을 계속 걸었다. 중간중간 자리에 멈추어 쉬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척박한 땅과 육지를 지나, 지금 블레어가 향하는 곳은 바다였다.
육지가 시들어감과 동시에 바다 역시 오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많은 호수와 강은 메마르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바다, 미개척지이며 자연의 미스터리가 남아 있는 바다는 살아남게 되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부분의 바다, 전보다는 줄어들었지만 바다는 아직 남아 있었다. 문명이 사라진 이후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깊숙한 곳으로 잠수하는 일은 어려워졌지만, 바다를 사랑하던 블레어는 세상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옛사랑을 찾아 나서듯, 바다에 이끌려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어느덧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축축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약하지만 물의 기운이 바위와 흙을 쓰다듬고 강타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블레어는 바다에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자신이 따라 걷던 과거의 바닷가를 생각했다. 과거의 바다에는 강렬한 햇빛을 반사하면서 생긴 보석과도 같은 윤슬이 가득 채워져 반짝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다양한 바다 동물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며 바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바다의 영혼에서도 행복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바다에서 그런 감정들은 대부분 씻겨져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메마른 육지보다는 생기가 도는 것 같다고 블레어는 생각했다. 과거에 비하면 별 볼일 없는 풍경이었지만 블레어는 계속 움직였다. 그녀는 바닷속으로 잠수하고 싶었다.
바다에는 물이 흐르고 파도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물은 다른 바다나 머나먼 육지와는 달리 오염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악취가 나지도, 눈에 보이는 오염물질이 있지도 않았다. 햇빛이 반사되어 빛이 났지만 바다와 해변은 아직 회색을 벗겨내지는 못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뚜렷한 생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블레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바다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다. 이곳의 바다는 다른 자연의 풍경과는 달리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녀는 준비해 온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전신 수영복이었다. 블레어가 옷을 갈아입자, 수영복은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하얀색의 물체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가 입에 문 것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호흡기였다. 이렇게 물 밖에 있는 동안 공기를 충전하면, 긴 시간 동안 물속에 잠수한 채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물방울이 나지도 않고, 바닷물이 오염될 염려도 없었다. 중간중간 다시 물 밖으로 나와 공기를 충전하면 얼마든지 잠수를 하고 물속을 누빌 수 있었다.
모래를 밟으면서 물에 몸을 적시자, 차가우면서도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햇빛 아래 몸을 태우고 달구던 블레어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바다의 모습은 그녀가 흔히 생각하던, 과거 사람들이 알고 있던 바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나타난 해안은 모래와 진흙을 밟아 바닷속으로 서서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모래와 흙이 섞인 땅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물속으로 향하는 구조는 같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이자 물의 영혼이 달라진 것 같았다. 이곳은 바다라기보다는 강이나 호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나무들이 숲을 울창하게 이루고 있었다면 확실히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 갔다. 블레어의 특수 수영복은 블레어의 살과 피부가 물에 직접적으로 닿는 것을 막았지만, 물의 촉감과 온도는 그대로 블레어에게 전달되었다. 블레어의 몸뿐 아니라 마음 역시 물에 잠기듯, 블레어는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곳은 깊지 않고 얕은 바다였으며, 점점 물이 깊어지려면 끊임없는 거리를 헤엄쳐야만 했다. 블레어는 얕은 물에서 헤엄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곳은 그래도 블레어의 머리 위 높은 곳까지 물에 차는 곳이었다. 블레어가 걸음을 걸으면서 물은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와 다리와 허리, 가슴 순서대로 블레어의 몸을 적셨다. 블레어는 마지막 숨을 들이쉰 다음, 물속으로 잠수했다.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대부분의 바다, 그중 알려지지 않은 바다의 한 얕은 부분을 블레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비행기와 배, 잠수함이 사라진 이후 인류는 다시 바다로부터 몇 발자국 멀어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블레어가 새로운 바다를 찾아내 헤엄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바다의 수면 아래는 바깥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듯한 곳이었다. 이곳의 풍경은 육지와는 많이 달랐다. 물 밖에서는 물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물의 수면은 바깥에서는 비밀의 베일과도 같았다. 하지만 물속에 잠수하자 물은 얼마나 맑고 투명했던지, 블레어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법의 유리와도 같은 수면 사이로는 햇빛이 내리쬐었다. 하지만 그것은 육지에서 느끼던 것처럼 뜨겁거나 눈부시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수면 아래 세계를 꽉 채운 물은 마치 햇빛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블레어를 보호하는 막 같았다. 물 아래로 들어오는 태양빛은 수면에서부터 바다의 바닥까지를 잇는 선을 이루었다. 그것들은 여러 개의 하얀 빛줄기로 눈에 들어왔다. 블레어는 그중 하나에 손을 뻗어 가져갔다. 빛줄기와 그녀의 손이 맞닿자 햇빛의 기운을 그녀는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블레어는 햇빛의 따뜻함과 물의 차가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상반되는 두 느낌은 서로 맞물리고 뒤섞여 물속을 헤매는 블레어에게 신비로운 촉감을 선사했다. 블레어는 이곳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기분 좋은 느낌과 감정이었다. 눈부시지 않고 적당히 밝은 햇빛은 맑고 투명한 물과 함께 바닷속 풍경이 더욱 뚜렷하고 생생하게 보이도록 해 주었다. 푸른 마법의 약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는 깨끗한 하늘색을 띠었다. 물 바깥에서 실제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이렇게 푸른 색깔은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위를 올려다보면 보이는 수면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빛의 줄기들을 하나씩 읽어내자 마치 하늘이 바닥의 연결 고리, 두 세계의 결합과 이어짐을 보는 듯했다.
이 광경을 보던 블레어는 장난기가 돌아, 빛줄기들이 마치 레이저 선인 것처럼 줄기들을 건드리지 않고 그 사이를 통과하며 느릿하게 헤엄쳤다. 머나먼 과거 영화들에서 보던 모습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얕은 바다를 헤엄치는 블레어는 마치 이 바다 자체처럼, 자신의 내면과 마음 역시 차분하고 깨끗해짐을 느꼈다. 깊지 않은 바다라 맨 위와 맨 아래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시야에 담기고 원한다면 그곳에 닿을 때까지 헤엄칠 수 있었기에, 블레어는 더 자유롭고 좋은 기분이 들었다. 블레어는 자신 한 명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이렇게 깨끗한 공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블레어는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놓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작게 품었으며, 자신이 헤엄쳐 온 뒤쪽을 돌아보았다. 뒤쪽 바다는 더럽혀짐 없이 그 이전처럼 청아하고 은은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바닷속을 헤엄쳐 나갔다. 순수한 아름다움에 취하고 들뜬 마음을 품은 채, 블레어는 곧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지는 못했다.
블레어는 새로운 얕은 바다를 탐험하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얕은 바다의 단아한 아름다움과 분위기는 블레어의 마음을 푹 적셨으며, 블레어는 풍경에 지루함을 느끼거나 질리는 일 없이 헤엄을 치며 나아갔다. 하지만 블레어의 마음 한구석, 불안감과 걱정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자리에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무엇인가 텅 빈 듯한 느낌이었다. 블레어는 자유롭게 헤엄을 치면서도 한편으로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이 갑작스러운 기분의 변화에 대한 이유는 알 것 같다가도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이성보다 뚜렷하고 부인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은 기분, 감정이었다. 뒤늦게 텅 빈 듯한 느낌, 공허함과 낯섦이 블레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독처럼 마음속을 물들이는 감정들을 잊기 위해, 블레어는 더 빠르게 헤엄쳤다. 아직 공기를 충전하기 위해 물 밖으로 나가려면 시간이 더 남은 상태였다. 블레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주변에 바위나 산호 같은 물체나 바다의 구조물이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바닥을 가득 채운 초록색 이끼는 마치 그녀가 공원에 오거나 카펫 위를 떠다니는 듯한 인상을 주었지만, 약한 싱긋함 외에는 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이곳은 색감과 촉감만 생기 있을 뿐 육지와 다름없이 황량한 곳이라는 생각조차 밀려들었다. 그런 생각들을 다시 꾹꾹 누르며 억압하는 블레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혀 탁하지 않고 맑은 물이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천히, 물속을 유영하면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던 블레어의 시야에, 저 멀리서 무엇인가 눈에 들어왔다.
탁하지 않고 맑은 물이었지만 이곳은 멀리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그래서인지 마치 안개에 싸인 듯, 그 물체는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무언가가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블레어의 마음을 물들이던 독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 대신 블레어의 마음은 빠르게 호기심으로 물들었고, 그녀는 곧바로 다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팔과 다리를 더 격렬하게 움직여, 블레어는 빠르게 그 물체를 향해 나아갔다. 블레어가 팔을 넓게 움직이고, 물체와의 거리가 더 좁혀졌다. 여전히 멀었지만 그것의 실루엣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선명해지는 듯했다. 갑자기 확 선명해지며 정체를 드러내지도, 더 작아지거나 흐릿해지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움직이는 물체는 아닌 듯했다. 멀리서 보는 실루엣으로 보아 그것은 작은 물체는 아님이 확실했다.
블레어의 마음에는 언뜻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안개와도 같은 물 속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저것은 무엇인가. 혹시 갑작스레 피어오른 공허함이나 불안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관련이 있는 대상일까. 혹시나 자신의 걱정을 확인시켜 주는 대상이 아닐까. 내가 그것을 향해 헤엄쳐 가는 것이 옳은 선택인가. 수많은 생각들이 블레어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블레어는 몸을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홀리고 이끌리는 듯, 블레어는 계속해서 물을 헤치고 나아갔다. 빛줄기와 물의 색조 사이를 헤엄쳐 블레어는 마침내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로 들어왔다. 물체를 확인한 블레어의 호기심은 놀라움으로 바뀌었으며, 그 자리에서 멈추어 둥둥 떠다녔다.
블레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나무 한 그루였다.
나무의 기둥은 굵지는 않았지만 튼튼하고 강인해 보였으며, 바다 아래 바닥에서 피어나 수면 바로 아래까지 줄기를 올려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의 모든 부분은 물 속에 잠겨 있었으며, 줄기 하나 잎 하나마저 물 바깥으로 내밀지 않았다. 중심 기둥 줄기에서 돋아난 작은 줄기들의 끝에는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꽃들의 색깔은 초록색부터 노란색까지 다양했으며, 나무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뚜렷한 색깔들을 자랑하듯 알록달록 빛을 냈다.
블레어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알지 못했다. 육지에서 나무나 식물을 본 지 너무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희미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런 종류의 식물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가 아니었다. 블레어의 마음속에서 불안과 걱정은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놀라움과 충격, 경이 비슷한 것이 빠르게 채워 나갔다. 블레어는 세상을 처음으로 마주한, 신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마주한 아이로 변신했다.
바다 근처에서 자라는 식물과 나무들은 존재했지만 이렇게 수면 아래, 물속에서 자라나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바다를 사랑하는 블레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나무는, 이런 광경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육지에서만 피던 식물이 물속, 바닷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나무는 죽어 가거나 점점 시들어 가는 중간 단계인 것 같지도 않았다. 물 밖 육지 어딘가에 심어져 있던 것을 인공적으로 바닷속에 옮기고 묻어 놓은 것 같지도 않았다. 블레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나무의 뿌리를 바라보았다. 나무의 뿌리는 바닥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끈끈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자리 잡아 있었다. 그녀는 두 눈으로 그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인공적으로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블레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닷속에서 생명을 마주했다. 이런 생명을, 나무 한 그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블레어는 물속에서 자리에 떠 있기 위한 발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점점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으며,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고개와 시선은 위로 올라가 나무와 거기에 열린 꽃을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나무의 모습은 더욱 생기 있어 보였다. 웅장함과 거대함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자신이 느꼈던 알 수 없는 공허함의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바다에서 생명의 부재를 느꼈기에, 아름다운 바다를 채울 생명을 보지 못했기에 공허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 마음의 공허, 텅 빈 듯한 감정은 나무를 발견한 이후 순식간에 채워졌다. 블레어는 다시 한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번에는 그 감정은 끊임없이 느껴왔던 공허함이나 외로움이 아니었다.
바다는 생명이 탄생한 곳이다. 바다 그리고 물은 깨끗하고 순수하며 원초적인 장소와 물질이다. 인류에 의해 더럽혀지고 황폐화된 육지를 떠나, 나무를 비롯한 식물 그리고 생명은 다시 물 아래로 내려가 새롭게 탄생한 것이었다. 블레어는 나무를 계속 바라보면서 이 사실을 깨우쳤다. 그런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스쳤다. 블레어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으며, 머릿속의 생각은 멈추지 않고 바닷물처럼 계속해서 흘러갔다. 블레어의 의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으며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블레어는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되새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 말이다.
생명은 바다에서 탄생해 이후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생명은 육지의 멸망 이후 다시 바다로,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구나... 끝 이후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 세계의 멸망 이후 생명은 다시 바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명이 탄생했던 태초 지구의 바다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상태로의 완전한 회귀는 아니었다. 인류 그리고 지구의 역사에서 지금껏 보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았던, 육지와 바다의 결합이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익숙하던 지구의 것, 자연의 것들이 만나고 결합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 새로운 세계가 곧 열릴 것이다. 바로 바다에서 말이다.
바닥에 내려앉아 있던 블레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블레어의 몸은 뒤로 천천히 내려가, 그녀는 바닥에 누운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물 속이었기에 그녀의 등은 바닥의 모래와 이끼에 닿지 않고, 공중에 살짝 둥둥 떠다니는 상태를 지속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수면을 넘어, 그리고 나무의 꽃과 잎사귀와 줄기를 넘어 블레어의 얼굴에 떨어졌다. 블레어는 나무의 꽃잎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오래 전 사라졌던 꽃이 그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 같았다. 같은 자리를 지키던 블레어는 몸을 돌려 바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맑은 물이 블레어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머나먼 저쪽의 바다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블레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예전과 같았으면 이렇게 미지의 세계의 입구에 다다른다면, 블레어는 무의식에 내재된 근본적인 공포심이나 압도감,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무의 발견과 함께 블레어는 변화를 겪었다. 블레어의 마음에서 시리고 저리는 듯한 감정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감정의 줄기는 가늘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세기는 강렬했다. 그것은 흥분이었다. 물 안쪽 깊은 바다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기대감이었다. 블레어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하고 중요한 서사의 일부, 그 시작을 발견한 것이었다. 블레어는 그 앞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세계의 서막이자 씨앗을 발견한 블레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중요한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생명이 다시 피어날 장소가 물속, 바다라면 인류도 바다로 향할 운명일 것인가. 육지와 바다의 결합, 인간과 바다가 결합되는 모습을 블레어는 상상했다. 인간도 이 나무처럼 물 아래에서 태어나 자라나고, 숨을 쉬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설과 동화와 신화 속에 존재하던 인어는 머나먼 미래에 드디어 이렇게 등장하는 것인가.
하지만 육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생명을 바다로 돌려보낸 주범인 인간을, 대자연의 새 고향인 바다가 과연 받아 줄 것인가? 블레어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시간만이, 블레어의 삶과 정신을 아득히 초월하는 기나긴 시간만이 품고 있었다. 블레어가 품은 질문의 답은 수백, 수천, 수만 년 이라는 시간의 끝 미래에 놓여 있을 것이다. 블레어는 이 질문의 답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블레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는 얼마 전과 변함없이 물속에서 굳건히 자라나, 물의 흐름에 따라 약하게 찰랑이고 있었다.
생명은 바다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육지로 올라오려면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하겠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명 그리고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바다와 육지의 동식물들이 결합되어 새롭게 펼쳐지는, 지구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신비로운 환상의 왕국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참이었다. 블레어는 저 멀리 희미해 보이지 않는 안쪽 바다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왕국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을 상상했다.
물속에 피어난 나무를 발견한 이후, 육지처럼 황량하던 블레어의 마음속에서도 생명이 피어나는 듯했다. 블레어는 나무를 발견한 순간과 이 바다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기억은 블레어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블레어는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물속의 약해진 중력 덕분에 손쉽게 일어난 그녀의 몸은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았다. 블레어는 나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잠시 그 주변을 돌며 헤엄치더니, 줄기 끝에 피어난 꽃 하나를 향해 올라갔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꽃이었다. 블레어는 꽃으로 손을 가져가 그것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곧 블레어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는 꽃 하나를 꺾어 자신이 가져가 보관할 마음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방해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었다. 인류가 저지른 실수를 블레어는 다시 반복할 수 없었다. 꽃을 꺾어가는 대신, 블레어는 그 자리에서 꽃들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블레어는 꽃들의 모습, 아름답고 생생한 그 모습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시키고 품었다. 블레어의 마음속에는 오래 전 사라졌던 꽃들이 다시 풍성하게 피어났다.
이후 블레어는 다시 몸을 돌려 얕은 바다를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얕은 바닷길을 헤엄쳐 가다 말고 가끔씩 뒤를 돌아 바다에 핀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는 여전히 물속에서 빛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머나먼 미래에는 인류도 바다의 생명 사이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겠지. 블레어는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 헤엄쳤다. 어쩌면 바다에서 다른 생명의 흔적을 찾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다시 흥분이 피어올랐다. 이런 생각을 유지한 채, 블레어는 얕은 바다를 따라 저 멀리로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녀는 물속을 누비고 육지에서도 바다를 내려보는, 바다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녀가 다녀간 자리, 바다에서 피어난 나무와 꽃에 묻은 아름다움은 물과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