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xhill Jun 03. 2024

은빛 호수   

[uncut writer's version]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밤과 아침 사이에 걸린 신비로우면서도 오묘한 시간. 외딴 정글의 숲에는 새벽녘의 고요가 하늘에서부터 땅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새와 곤충들의 조그마한 울음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으며, 짙은 어둠을 뚫고 푸른빛이 다시 식물과 토양에게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이곳, 한 여인이 커다란 나뭇잎과 가시 같은 줄기를 헤치며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묶어 포니테일을 만든 그녀는 등에는 작은 배낭을, 양손에는 나침반과 지도를 들고 있었다. 지도는 낡아 해졌지만 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두운 새벽에도 약하게나마 빛을 내뿜었다. 시원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지만 마치 죽어가는 양의 숨길처럼 약하고 희미했다. 바람은 짧은 상의와 하의 아래로 드러난 여인의 팔다리를 간지럽혔지만, 새벽에도 이곳을 가득 채운 공기의 습함과 뜨거움을 이길 수는 없었다. 때문에 여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온 정글이 견딜 수 없는 열기와 습기로 가득 차기 전에, 그녀는 낡은 은빛 지도에 희미하게 새겨진 몇 안 되는 표식 중 하나에 도달해야만 했다. 그것이 여인의 목적지였으며, 그곳까지 길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정글 속을 나아가는 그녀의 이름은 리엘라였다. 리엘라는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사람의 손과 발이 닿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명과 시간에게 버림받고,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정글을 가로질러 그녀가 향하는 곳은 한 호수였다. 은색으로 빛이 나는 아름다운 호수, 그곳은 바로 인어들이 사는 호수였다.



버려진 정글 속 한가운데, 인어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는 은색 호수. 그곳의 위치를 적은 마지막 유물이 바로 은빛의 지도였다. 대를 이어 전해져 오는 전설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마지막으로 내쉰 숨결 끝에 맺힌 유언이자 유산. 그것이 바로 이 지도였다. 리엘라는 과거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인어를 향한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껴 오고 있었다. 자연이 인간에게 남긴 마지막 불가사의들, 그 수많은 불가사의 가운데 자신은 왜 인어에게만 강하게 이끌리는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리엘라는 알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그 감정이 마치 자석처럼 그녀를 끌어당기고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인어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그리고 인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 역시 농후했다. 하지만 은빛 호수가 바로 인어들이 살던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와 장소의 물, 그들이 실존한다면 인어들이 헤엄치고 살아가던 태초의 그 물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새벽이 아침에 가까워지며 사방에 펼쳐진 풀과 나뭇잎에 이슬이 맺혔다. 차갑고 초록빛을 띠지만 떨어지는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 깨끗하고 투명한 이슬. 리엘라는 자신의 얼굴에 맺힌 수많은 물방울들이 자신의 땀인지, 아니면 정글이 자신에게 던진 이슬방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길을 나아가는 리엘라의 젖은 얼굴과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물방울, 그리고 그것들이 조그만 바람기와 만나 생겨나는 차가움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짙은 푸른색은 점점 뚜렷하고 밝게 변해 갔으며, 리엘라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길이 거의 끝나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보다 먼저 리엘라가 목적지에 도달하면서, 새까만 밤에서 시작되어 새벽으로 이어진 그녀의 발걸음은 끝이 났다. 리엘라의 눈앞에는 마치 고대의 화가가 그린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인간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깃든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너무 좁지도 너무 넓지도 않은 아름다운 호수였다. 호수의 뒤편으로는 산과도 같은 거대한 바위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청량한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바위 아래로 동굴이 있거나, 다른 호수나 강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음이 분명했다. 세상이 인간으로부터 숨긴 보물이자 낙원, 인어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 믿기는 곳이었다. 호수는 태양의 황금빛 얼굴이 없이도 은은하면서 깨끗한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후 하늘 높이 태양이 고개를 들고 나면, 이곳은 더욱 눈부시고 화려하게 반짝거릴 것임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발걸음을 멈춘 리엘라는 배낭을 내려놓은 채 그 자리에 팔을 벌리고 드러누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흙과 풀잎으로 몸을 감싼 채 자연의 생명력과 고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것들은 물방울과 열기가 그랬던 것처럼, 리엘라의 팔과 다리를 타고 올라고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땀이 완전히 마르기도 전에, 리엘라는 눈을 뜨고 다시 일어났다. 비록 목적지에 도달했고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리엘라의 여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인어들을 찾아서, 리엘라 자신이 직접 은색 호수에 들어가야만 했다.



리엘라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 가슴부터 팔과 다리 그리고 발끝을 천천히 훑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얇은 상의는 마치 물에 적신 듯, 그녀의 몸에 쩍 달라붙어 있었으며 그 아래로 붉은색 브래지어가 비쳤다. 그녀의 팔과 다리 역시 깨끗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신이 호수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리엘라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숨겨진 정글의 신비로운 호수, 인어들이 산다는 전설 속의 장소였다. 그런 호수와 마찬가지로 리엘라는 이곳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도,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는 존재도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한 리엘라는 부끄러움이나 머뭇거림 없이, 땀에 흥건히 젖은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몸에 달라붙어 끈적거리는 하얀색 탱크톱과 짧은 청바지를 벗은 그녀는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되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리엘라는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가 브래지어의 끈을 풀어헤쳤으며, 이후 팬티까지 벗은 그녀는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태초의 정글 속에서, 그녀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몸이 되었다. 정글의 공기와 바람이 직접적으로 닿지 못하던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타고 들어갔다. 리엘라는 두꺼운 공기를 뚫고서 양팔을 멀리 벌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리엘라는 거대한 정글의 일부를, 자신의 작은 존재에 해당하는 일부를 몸속으로 빨아들였다. 리엘라는 그렇게 지금껏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고 받아들이면서도, 아직 땀에 젖은 자신의 몸은 호수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잠시 동안 머뭇거리며 주위를 살피던 리엘라는 곧 커다랗게 부푼 초록 식물과 나뭇잎을 찾아냈다. 자연을 누비며 익힌 지혜를 발휘할 때였다. 미소를 지으며 그 아래로 걸어간 그녀는 거대한 잎사귀와 나뭇잎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사이로 나타난 거대한 원형의 초록 방울을 천천히 기울였다. 식물과 비슷한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방울은 단단하면서도 축축한 느낌이 만져졌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 안에 담겨 있던 차갑고 깨끗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식물이 품고 있던 시원한 빗물과 수분은 물결이 되어 리엘라의 몸을 스쳤으며, 얼굴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내려가면서 그녀의 땀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그녀의 땀을 먹은 물은 땅 속으로 들어가, 다시 대지의 생물과 식물을 품고 피워내는 거름이 될 것이었다. 깨끗한 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리엘라는 드디어 호수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녀의 마음이 다시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배낭을 들고 호수의 물과 숲의 땅이 만나는 경계로 걸어갔다. 배낭을 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서 그녀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의 얕은 부분에 있는 바위와 모래의 형상은 맑은 물을 뚫고 날아와 그녀의 시야로 들어왔다. 저 멀리 깊숙한 곳까지 펼쳐진 호수로 은빛 물은 이어졌으며, 그녀의 시야를 막는 것은 수면 위로 그을린 거대한 바위의 그림자뿐이었다. 가까이 있지 않은 호수의 표면은 은색으로 빛났으며,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리엘라는 배낭에서 준비해 둔 작은 호흡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작은 크기의 호흡기는 물속에서 리엘라가 숨을 쉬도록 도와주고, 호수를 헤엄치고 누비는 데에도 전혀 방해물이 되지 않을 터였다. 뛰는 가슴을 다시 가다듬으며, 리엘라는 호수 안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호수 물의 차가움이 온몸에 전류처럼 퍼지면서도, 리엘라는 멈추지 않았다. 호수의 물은 그녀의 발목에서 시작해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으며,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우아하게 감싸고 있었다. 여전히 호수의 내부는 은빛 물결에 가려 자세한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그 모습을 확인할 때였다. 리엘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팔을 꼿꼿이 세운 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치 화살처럼, 그녀는 호수의 중앙을 노리고 물속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리엘라는 순식간에 호수 깊숙이 잠수했다. 물속에 들어오자 바깥에서 보이던 것은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끝에서 이어져 나가면서 호수의 물속 풍경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올랐다. 이 모든 것들은 리엘라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물속에는 옅은 은빛뿐 아니라 청록색이 스며들어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싼 물뿐 아니라 바위와 구조물, 물아래로 내려온 몇몇 나무뿌리와 바닥의 모래까지 모든 것을 청록색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듯했다. 하지만 물속을 채운 색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뚜렷하게 보였다. 호수를 헤엄치는 리엘라는 물이 너무 투명한 나머지 자신이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중을 떠 다니는 것 같았다. 공중을, 물속을 떠다니며 느릿하게, 하지만 원하면 무엇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는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몽환적인 감정을 느꼈다. 꿈속을 떠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녀는 중력의 족쇄에서 벗어나 느릿하게,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을 치면서 해방과 흥분을 느꼈다. 인어들이 살고 숨 쉬던 물이라 그런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리엘라는 아직 호수의 가장자리, 물이 얕은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땅바닥의 모래를 헤치면서 유유히 헤엄을 치며 나아갔다. 그녀는 서서히 호수의 중심부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으며, 곧 바닥이 푹 꺼짐과 동시에 리엘라의 눈앞에 물속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수의 내부는 바깥에서 바라보던 것보다, 그리고 리엘라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깊고 거대했으며 넓게 펼쳐졌다. 은빛과 청록색은 그것들이 묻어 있던 언덕에서 뻗어나가 서로 맞물리고 뒤섞이면서 새로운 색감과 느낌들을 만들어 냈으며, 호수의 물속 전반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물속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본 호수의 수면은 더 옅고 푸른 은빛을 뿜어냈다. 은빛이 강렬하게 반짝거림을 통해 리엘라는 바깥에서 일출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과 공기, 호수와 숲을 가로지르는 경계와도 같은 수면, 호수의 하늘과도 같은 그것은 태양빛을 걸러내고 은빛 아우라를 입혀 물속으로 내리쬐었다. 예상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리엘라는 푸른색과 은색의 빛이 묻은 모습에 취한 듯, 그 자리에서 둥둥 유영하며 가만히 있었다. 리엘라는 거대한 발견을 이루어낸 고고학자가 된 것처럼,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흥분을 발산시키듯 호수 깊숙이 내려갔다. 몸을 회전하고 흔들기도 하면서, 리엘라는 호수 구석구석을 누볐다. 저 멀리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다가간다는 마음으로, 리엘라는 호수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서 계속해서 호수를 탐색했다. 물론 그녀가 가장 기대하는 것이자 그녀의 흥분감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이어였다. 이렇게 뜨거운 마음 덕분인지, 물에 적응된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물의 차가움은 느껴지지 않았으며 리엘라는 지치는 기색 없이 물속에 들어오고 나서 더욱 힘을 내 헤엄쳤다. 호수의 구석구석에는 알록달록한 산호가 얼굴을 삐죽 드러내고 있었으며, 지금껏 보지 못한 눈곱만 한 물고기와 물방개들이 리엘라의 시야에 나타났다. 바다에서 볼 법한 이런 생물들의 존재로 인해, 리엘라는 이곳이 평범한 호수가 아님을 느꼈다.



하지만 호수에는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은 강렬하고 생생한 빛과 색감이 사려 있었지만, 물속의 리엘라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바위였다. 벽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들부터 시작해 거기서 내려와 바닥과 언덕을 이루는 작은 바위와 돌멩이들까지, 호수는 바위와 돌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산호부터 물고기까지 생물체들이 존재했지만, 그것들의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리엘라가 호수에 적응하자, 화려한 빛깔에 가려졌던 회색 바위의 적막함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리엘라의 마음에서도 흥분감이 점점 가시고, 바깥에서 본 거대한 바위의 그것처럼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리엘라가 이곳에 온 이유인 인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수의 대부분을 탐험했지만 이 사실은 변함없었다. 리엘라의 마음에서 호수에 들어오던 순간의 무지개 같은 감정들은 대부분 빠져나갔으며, 그녀는 묵묵히 물속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듯, 호수의 수면을 통해 들어온 은빛 햇살은 더욱 강렬하고 화려하게 호수 내부를 비추었다. 빛의 정도를 보니 정오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리엘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호흡기 사이로 거대한 물방울 여럿이 피어나 위로 올라갔다.



수면으로 올라가는 물방울들은 마치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리엘라의 꿈과 기대감과도 같았다. 리엘라는 물방울들에게 시선을 더 주지 않고, 호수의 바닥으로 헤엄쳐 갔다.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호수 밑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이 리엘라는 내려갔다. 호수의 바닥은 역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 부드러운 모래가 만져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수면은 멀리 떨어져 보였지만 여전히 바닥 부분이 어둠에 잠기지 않도록 빛을 비추고 있었다. 리엘라는 마지막으로 바닥의 바위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바위 사이에 인어의 흔적이 있거나, 보이지 않던 동굴이나 통로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바위를 누비는 리엘라의 마음에는 한 줄기 희망이, 기대감이 다시 피어올랐다. 리엘라는 울퉁불퉁한 바위를 쓰다듬고, 아래로 가라앉는 모래를 헤치면서 나아갔다. 얼마 후, 탐색을 하는 간절한 리엘라 앞에 호수가 한 조각 실마리를 던졌다. 리엘라의 시선은 바위 하나에 고정되었다. 넓고 두툼한 크기의 남색 바위에는, 작지만 하얀색으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림은 결코 아니었으나 단지 바위에 생긴 자국이라기에는 질서가 있고 인공성이 있었다. 바위를 잠시 바라보던 리엘라는 새겨진 자국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그것은 고대 민족들이 사용하던 언어였다. 비록 이것은 인어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으나, 이것은 호수에서 리엘라가 발견한 첫 인간의 흔적이었다. 만약 인어들이 존재한다면 이 민족들의 언어를 사용했을까? 리엘라의 마음속은 소용돌이처럼 그녀의 생각들을 흡수하고 휘감았다. 리엘라는 다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기억 속 지식을 동원해 문자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천천히 리엘라는 바위에 들러붙어 문자를 해석했다.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얼마 후 리엘라는 해석을 완료했다.



'우리의 존재와 기원에 대한 답을 담고 있는 곳, 우리가 온 곳이 자연이다. 우리의 뿌리인 자연과의 고리, 연결을 끊지 말자 놓지 말자.'



알 수 없는 말에 리엘라는 당혹스러워했다. 이것은 인어가 남긴 말 같지 않았다. 땅 위를 살아가던 고대 민족들이 글을 새긴 바위가 호수 아래로 떨어져, 지금까지 호수의 바닥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주위의 바위들과는 달리, 바위의 색감이 회색이 아닌 남색에 가깝다는 것 역시 이상했다. 리엘라는 해석을 마치자마자 바위를 한 대 친 다음, 위로 헤엄쳐 올라갔다. 이제는 실망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리엘라는 이곳이 아닌 세계의 다른 곳을 누벼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인어가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리엘라에게는 이제 드디어 수면 위로 나갈 일만 남아 있었다. 나가서 옷을 입은 다음 호수를 떠날 예정이었다. 자신이 돌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 변함없이 말이다. 리엘라는 한숨이 섞인, 하지만 차분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호수의 물속과 바위들을 훑어보았으며, 그녀의 시선은 아래로 내려가 바닥의 바위들을 내려보았다. 두툼하게 놓인 수많은 바위들이 리엘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문자가 새겨져 있던 남색 바위. 그 바위의 옆에 드러난 하얀 모래는 호수의 속살과도 같았는데, 그곳에는 네모난 한 물체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리엘라는 시선을 집중해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리엘라의 입에 있던 호흡기였다.



호흡기를 다시 주워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완전히 스치기도 전에, 리엘라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호흡기 없이 내가 숨을 어떻게 쉬고 있지? 리엘라는 여전히 물속에 있었으며, 호수의 바닥과 하늘 사이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문제없이, 시원한 공기를 들이쉬듯 숨을 쉬고 있었다. 리엘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다시 호흡기가 있던 바닥의 모래를 내려다보았다. 호흡기를 바라보던 리엘라의 시선에, 이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호흡기보다는 가까운 자신의 하반신, 다리 부분에 새의 깃이나 날개와도 같은 화려한 무언가가 물결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물고기의 꼬리와도 같았다. 리엘라의 하반신에는 다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꼬리가 헤엄을 치고 있던 것이다. 숨이 멎은 리엘라는 하반신에서 시선을 올려 자신의 몸 전체를 훑어보았다. 호수에 들어오던 때와는 달리 리엘라는 더 이상 알몸이 아니었다. 호수의 것과 비슷한 은색을 가진 비늘이 그녀의 가슴을 뒤덮고 있었으며, 그녀의 팔과 배에도 은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림은 이어지고 있었다. 리엘라의 몸은 비늘이 뒤덮고 있었으며, 하반신에는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녀의 몸이 바뀌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어의 몸을 알아챈 리엘라에게 호수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호수에는 더 이상 인어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인어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호수의 은빛 물, 인어들이 마시고 숨 쉬고 살아가던 그 물, 호수는 이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변함없이, 호수는 정글에서 홀로 외롭게 남겨져 그 은빛 아름다움만을 간직한 채 시간 속에 멈추어 있었다. 허나 끝없는 시간을 지나 인어의 후손이자 인어의 피가 남아 있는 리엘라가 호수에 도착한 것이다. 인어들이 살아가던 물이 리엘라의 몸을 적시고 감싸자, 그녀의 몸에 잠들어 있던 인어의 피, 인어의 유전자가 깨어나게 되었다. 호수에는 사람들을 인어로 바꾸는 마법 따위는 걸려 있지 않았다. 인어의 피가 흐르는 인간을 인어로 바꾸어 줄 뿐이었다.



인어의 물에 들어오자 리엘라는 몸속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과거이자 진실을 마주했다. 리엘라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육지에서 눈물은 볼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지만, 물속에 잠긴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은 작은 물방울이 되어 씻겨 나왔다. 눈물방울들은 리엘라의 눈앞을 천천히 떠다녔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를 발견했다. 리엘라의 비늘과 꼬리는 하늘에서 비치는 은빛 태양빛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빛났으며, 인어를 다시 마주한 호수의 내부에도 생명력이 다시 퍼지는 듯했다. 리엘라는 꼬리를 흔들면서 헤엄쳐 수면 위로 올라갔다. 호수에 들어온 이후 물의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던 것, 지치지 않고 더 힘을 내서 헤엄칠 수 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늘이 리엘라의 몸을 감싸고, 다리 대신 생긴 꼬리가 물속을 헤치고 나아갈 힘을 준 것이었다.



호수의 하늘 가까이 날아간 리엘라는, 수면을 뚫고 다시 호수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정글의 따스한 햇살과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전처럼 불쾌하거나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리엘라는 수면 위로 얼굴만을 내놓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리엘라는 은색 호수로의 여정에서 커다란 발견을, 원하던 것에 대한 발견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기쁨은 인어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데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였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고 찾아 헤매던 것은 바깥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깨워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리엘라는 호수의 얕은 물로 나아가, 하늘 위의 태양빛을 받으면서 모래 위에 누워 있었다. 호수에 도착해서 그랬던 것처럼, 리엘라는 팔을 벌린 채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그녀의 닫힌 눈 사이로 태양의 따뜻함과 환한 빛이 들어왔다. 은빛은 아니었지만 리엘라는 그것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리엘라가 눈을 뜨자 그녀의 꼬리는 다시 다리로 변해 있었다. 가슴을 덮던 비늘도 사라져 그녀는 다시 알몸으로 돌아와 호숫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묻은 은빛 호수의 물기는 태양과 함께 그녀의 몸을 아름답게 빛나도록 만들었다. 리엘라는 빛나는 자신의 몸과 물, 그리고 호수를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정글의 열기를 뚫고, 저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와 풀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바람은 아니었지만, 리엘라의 몸을 간질이는 바람은 청량하면서도 뚜렷했다. 리엘라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배낭으로 다가갔다. 앞으로 평생 이 호수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 호수를 찾아오는 일은 결코 마지막이 아닐 터였다. 리엘라는 이 호수의 비밀을 지킴과 동시에, 자신과 같은 이들을 찾아야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남색 바위에 새겨져 있던 글귀를 리엘라는 드디어 이해했다. 그녀의 비밀을 담은 자연을 리엘라는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미스터리들이 해결되며, 동시에 새로운 의문과 호기심이 그 자리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곧 세계를 더 이해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풀수록 우주의 비밀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것이라고 리엘라는 생각했다. 자연에 대한 비밀이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리엘라는 인어에 대한 알 수 없는 이끌림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했다. 리엘라 본인도 알지 못했던, 무의식에서 피어오른 자기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끌림이 인어에 대한 이끌림으로 번져 올라 리엘라의 모험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리엘라는 옷을 입고 호수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은빛 물을 바라보았다. 우주에는 우리들이 결코 풀 수 없는 미스터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답은, 우리들의 내면에 존재한다. 리엘라는 변화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 길을 다시 걸어갔다.


"자연의 비밀을 찾는 여정과 우리의 비밀을 찾는 여정은 서로 얽혀 있다. 그 두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 이름이 소실된, 고대의 한 탐험가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의 보물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