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를 마주 보고 있는 낮은 언덕,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의 평지에는 한 별장이 있었다. 초록 풀과 흙 위에 세워진 별장은 깨끗하고 뚜렷한 하얀색을 띠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주황색 조명은 하얀색 케이크에 올려진 사탕 장식과도 같았다. 태양이 서서히 지고 바다 위로도 초저녁의 어스름한 분위기가 내려앉을 때, 별장과 그곳에 연결된 저택은 하루 동안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지평선 너머에 남아 있는 붉은색 노을 자국은 바다 그리고 저택까지 뻗어와 그 시간만에 느끼고 볼 수 있는 마법을 사방에 흩뿌렸다. 별장의 바깥쪽에 설치된 하늘색 수영장에는 불빛이 켜지면서 투명하면서 빛나는 푸른색으로 바뀌었으며, 주변에 놓인 의자와 태닝 배드들 역시 검은 하늘 아래서 하얀 자태를 뽐내었다. 저택에는 창문이 없는 대신 벽들이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를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대한 TV와 난로가 설치된 거실, 운동 시설, 고급 레스토랑과도 같은 부엌까지, 평범한 사람이면 꿈도 꿀 수 없는 으리으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항상 다는 아니었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집의 고급진 내부의 아래, 유리 벽이나 창문이 없는 곳이 있었다. 땅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바깥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곳이 있었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집 내부의 어딘가에 설치된 비밀 문을 통하고, 그 이후 다시 수많은 비밀 통로와 문을 따라, 집의 지하실로 향하는 길이 미로처럼 나 있었다. 지상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지하실에 가까워질수록 별장과 저택의 으리으리함은 점점 희미해져 갔으며 그 자리를 녹슨 금속과 먼지, 낡은 복도와 천장이 채워 나갔다. 지하실의 입구에 들어설 때면 저택과는 완전히 다른 건물, 다른 세상에 와 버린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을 알고, 비밀번호를 알며, 생체 신호가 작동하는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그녀는 지금 지하실 안에서 자신만의 일을 하고 있었다.
별장의 지하실은 거대했다. 마치 하나의 강당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는데, 강당보다는 천장이 많이 낮았지만 양옆으로 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으며 수많은 작은 장비들과 시설물, 계단과 탁자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지하실은 바깥의 통로와 복도보다는 깔끔하고 고급졌지만, 여전히 지상의 저택과 별장에 비하면 볼품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태양이나 시원한 바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지하실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축축하고 젖은 듯한 분위기와 감촉이었다. 태양이 없고 밤낮의 구분도 희미해져 뒤섞여버린 장소였지만 어둠이 내리 앉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그 이유는 바로 지하실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물탱크였다.
수조의 모양을 한 물탱크는 단단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푸른 물과 작은 땅의 모형만이 위치해 있었다. 수조 바깥에서 유리 안을 들여다본다면 하늘색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지하실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축축함과 물기는 바로 이 물탱크 때문이었다. 여기에 채워진 물은 구할 수 있는 다른 물과는 달랐다. 물탱크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땅의 모형은 실제 땅을 재현해 놓은 것이었는데, 역시 근처 숲이나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흙과 식물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벽들에는 수많은 그림과 정보 등을 묘사하고 적어 놓은 낡은 종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길게 늘어선 탁자들에는 컴퓨터와 더불어 다양한 실험 장치와 모형, 화석, 표본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터인지 약하게 먼지로 둘러싸인 그것들에서는 신비로우면서도 미스터리한 느낌이 풍겨 나왔다. 이 수많은 물건들은 한 대상을 다루고 있었으며, 언뜻 보기에는 다양하고 다른 것들을 다루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그 한 대상으로 귀결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인어를 연구하는 수단들이었으며, 지금 지하실의 앞에서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집의 주인은 큰 발견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릴리였다.
릴리의 벽에 걸린 인어들을 묘사한 고대의 그림들과 선원들의 편지를 담은 누런 종이들 사이에, 낡지 않고 새것인 종이가 몇 가지 있었다. 그것들은 릴리가 과거에 빠르게 취득했던 학사와 박사 학위, 연구원 임명서 등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지하실을 메운 실험도구와 값비싼 장비들 중에서는 포장을 제대로 벗겨내거나 용품 마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들은 공개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지하실로 들여온 것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오래된 문서들과 과학 장치들 사이에는 툭 튀는 것들도 있었다. 인어공주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과 영화 포스터, 조각상 등이 그것이었다. 인어를 연구하는 릴리는 오래전부터 인어에 대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인어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열망을 타오르게 하는 장작이 되었다. 낡은 종이와 차가운 기계들 속에 놓인 인어공주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릴리는 컴퓨터 앞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화면만을 바라보고 타자기를 치는 그녀의 얼굴은 젊었지만, 찌푸리고 있는 표정에서는 많은 양의 스트레스와 잠 없이 보낸 나날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넘어 릴리의 얼굴 뒤쪽에 희미하게 하지만 검게 드러난 것은 하나의 강렬한 집착이었다. 학문적인 집착과 더불어 더 개인적인 무언가가 결합되어 탄생한 그 집착은, 평범한 사람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광적이고 무서운 것이었다. 릴리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릴리는 컴퓨터에 나타난 시뮬레이션을 다시 확인했다. 이미 여러 번, 어쩌면 수십 번씩 확인한 단계이지만 릴리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계,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단계였다. 릴리가 인어 연구를 비밀 지하실 아래로 옮긴 이후 진행한 단계의 결정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걸음을 삐끗한다면, 이 결과물을 망쳐 버린다면 릴리가 진행해 온 연구의 대부분, 혹은 전체가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릴리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돌려 실험 장치를 살펴보았다. 장치들을 통해 이번 단계의 결과가 나타날 터였다.
릴리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콩닥콩닥 소리가 들려왔다. 릴리는 손가락을 내밀어, 컴퓨터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타자 바로 위에 위치한 순간에도 희미한 떨림을 감출 수는 없었다. 릴리의 손가락은 버튼을 눌렀다.
프로세스는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시뮬레이션들을 돌리면서 수없이 확인했고, 예상되던 속도대로 진행되는 것이었지만 그런 만큼 실제 진행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떨리면서도 초현실적이었다. 릴리의 시선은 컴퓨터에서 떨어져 실험 장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가 나지도, 불빛과 번개가 치지도 않았다. 이것은 훨씬 조용하고 재빠른 과정이었다.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곧 실험 장치 한가운데 위치한 텅 빈 소형 유리병에서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리병에 푸른빛의 액체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검고 어두운 실험 장치들 사이에서, 유리병에 채워지는 푸른 액체는 밝은 빛처럼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릴리의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스며나가고, 그 자리를 안정감과 흥분감이 서서히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푸른 액체는 유리병을 타고 올라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릴리의 검은 눈동자에 푸른 액체가 비쳐 보였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푸른 액체는 유리병의 뚜껑 아래까지 도달했다. 실험 장치들은 가동을 멈추었고, 유리병은 액체로 가득 찬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병을 향해 걸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릴리는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안에 담긴 푸른 액체는 지하실 물탱크에 담긴 푸른 물과 비슷한 색감으로 빛났다. 하지만 훨씬 맑고 밝은 느낌을 주었으며, 안쪽에서는 마치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하얀색이 위치해 있었다. 릴리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쥔 릴리의 손에서는 떨림이 멈추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보다 더 강렬하게 뛰면서 두근두근 소리를 릴리의 귀로 올려 보냈다. 릴리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그녀의 손에 담긴 것은 고대 인어의 혈액이었다.
인어의 혈액을 찾기 위해, 인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릴리는 수많은 화석들과 자연을 누비고 뒤적였다. 끓는 물과 같은, 타오르는 불과도 같은 그녀의 집착과 열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 과정은 항상 깨끗하지만 않았다. 다가가서는 안 될 곳으로 향하고, 만져서는 안 될지도 모르는 것들을 만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을 릴리는 마침내 찾아냈다는 것이다. 인어의 혈액은 무슨 이점이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릴리가 원하는 것은 그중 오직 하나였다. 릴리는 인어의 혈액을 통해 자신을 인어로 변신시키기를 원했다.
릴리는 시간을 더 지체하거나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릴리는 유리병과 함께 옆에 놓여 있던 주사기를 챙겼다. 그러고 나서 뒤쪽에 있는 수족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굳은 결심과 마음의 힘이 느껴졌다. 천천히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새 수족관의 앞에 도착했다. 푸른 물과 그녀 사이에 놓인 것은 계단 하나뿐이었다. 수족관 안에 담긴 물과 흙 역시, 인어가 살던 태초의 바다를 최대한 가깝게 재현해 놓은 것이었다. 수족관에 들어가기 전, 릴리는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릴리는 자신 앞에 놓인 작은 푸른 바다에 고정했다. 옷을 벗어 옆에 툭, 내려놓는 그녀는 마치 재단에 올라가기 전 준비를 하는 사제의 모습과도 같았다.
알몸이 된 릴리는 주사기와 병을 들고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자 지하실의 분위기와 물기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지하실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지하실의 느낌과 지하실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계단의 끝에 올라선 릴리는 수족관의 가느다란 유리 벽을 발끝으로 느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 고대 바다의 푸른 물이 마치 불처럼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릴리는 그 아름다움과 은은함, 신비로움에 잠시 홀렸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주사기에 유리병을 장착한 다음, 바늘을 자신의 팔에 가져갔다.
바늘이 릴리의 살을 찌르고 들어갔고, 릴리는 주사기를 눌렀다. 인어의 혈액은 서서히 릴리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릴리는 원래 주사를 맞을 때는 다른 곳을 쳐다보는 습관을 가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팔과 거기에 꽂힌 주사기를 바라본 채, 푸른 액체가 혈관을 타고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액체가 한 방울 없이 사라지고 유리병이 텅 빌 때까지 말이다. 마침내 주사가 완료되었다. 릴리의 마음이 흥분으로 타오르고 각성한 상태여서인지는 몰라도, 인어 혈액을 주사하는 과정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이후 릴리는 손에서 힘을 빼, 주사기와 유리병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실수하는 것을 대비한 장비들이라, 땅에 부딪힌 이후에도 그것들은 깨지지 않고 작은 소리를 짧게 낼 뿐이었다. 릴리는 숨을 다시 한번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녀는 발부터 시작해 물속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물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적정한 온도였다. 릴리가 몸을 점점 깊이 담그자 파란색 음료의 단맛이 입안에 느껴졌다. 입을 열고 혀를 내민 상태도 아니었지만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물의 촉감과 기운은 릴리의 다른 감각들도 이렇게 자극했다.
릴리는 어느덧 수조 안에 얼굴만을 내놓은 채, 몸을 전부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깊은 수조는 아니었지만 머리를 내놓은 상태에서 릴리의 발끝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정말 바다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릴리는 팔과 다리를 약하게 움직이면서 헤엄을 쳤다. 그녀는 가장자리에 마련된 작은 땅 모형으로 다가가 몸을 기댔다. 이제 릴리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이었다. 혈액을 만들어내는 단계,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주사하는 것까지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릴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없었다. 오직 수조에서 태초의 바닷물로 몸을 적시면서, 몸 안의 인어가 깨어나도록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릴리는 자신의 다리가 꼬리로 변한 이후에도, 지하실 그리고 집 안을 다시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장치를 해 놓은 상태였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지하실 구석에 있는 통로와 물길을 통해, 별장 옆에 있는 바다로 바로 향할 수 있는 길도 있었다. 릴리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인어공주의 동경에서 시작되어, 다른 인간들보다 순수하고 특별한 존재로 군림하는 것, 태초의 바다를 누비던 인간의 조상임과 동시에 다음 진화의 단계가 되는 것. 자연의 비밀을 함께 공유해 세상으로부터 지키고 웃는 것. 릴리의 마음에는 야심이 가득했다.
릴리의 마음속에는 흥분감과 함께 결과에 대한 긴장감, 기대감 같은 다양한 뜨거운 감정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조에 펼쳐진 작은 바다에 들어와 있으면서, 그런 감정들은 서서히 물에 희석되어 갔다. 뜨거운 감정들이 희미해지고 정신이 풀리자, 릴리는 마음속에서 졸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졸음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몸 곳곳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이것도 인어 혈액을 주사한 이후의 과정인가? 릴리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잠이 온다면, 잠에 빠지게 된다면, 다시 일어난 이후에는 인어가 되어 있겠지. 두 다리는 아름다운 꼬리로 변해 있고, 꼬리에서 시작된 알록달록하고 반짝이는 비늘은 위로 올라와 몸을 아름답게 뒤덮겠지.
릴리는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즐거운 생각들을 마음속에 품은 채, 편안하고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릴리는 그리고 자연스럽게 물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운 자세가 되었기 때문에,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조 위 천장에는 거대한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릴리는 곧바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릴리는 거울 속에서 푸른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자신의 모습, 인간의 모습을 한 자신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다음 눈을 감았다. 곧바로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연구를 하며 지새웠던 불면증의 밤들과는 달리 포근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속에는 카펫이 깔렸으며, 그 위를 한숨의 잠과 꿈, 그리고 인어의 몸이 밟고 걸어올 차례였다. 다시 눈을 뜨면 변화된 그녀의 몸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릴리의 마음은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물속 깊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릴리는 정신이 들자마자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꾸지도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고 잠시 정신을 돌린 그녀는 다시 마음을 스치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자신의 모습을 빨리 확인해야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으나 거울은커녕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 앞에는 출렁이는 물결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물속에 잠수해 있었다.
릴리는 흥분을 느꼈다. 물속에 이렇게 잠수해 잠을 자고,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인어가 된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몸을 흔들면서, 수조 반대쪽으로 나아갔다. 손쉽게 헤엄이 쳐지는 듯했다. 릴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릴리는 생각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바로 머리 위의 수면을 향했다. 물 바깥으로 튀어나온 릴리는 수조 위의 거대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바라본 릴리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거울 속에 비친 존재는 인어가 아니었다. 아니, 인어는 맞았지만 릴리가 생각하던 인어의 모습이 아니었다. 젖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몸에 들러붙어 있었으며, 눈에는 하얀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튀어나와 있었다. 몸에는 비늘과 함께 칼에 베인 듯한 거대한 아가미가 드러나 있었으며, 다리가 합쳐진 꼬리에는 수많은 작은 갈퀴들이 나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팔과 손에는 물갈퀴가 나 있었으며, 한 부분도 빠짐없이 몸을 덮은 비늘은 거칠고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거울 속에는 괴물과도 같은 인어가 모습을 내밀고 있었다. 괴물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릴리는 더 끔찍한 사실을 조우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다.
릴리는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인간 여성의 높은 비명이 아닌, 동물의 소름 끼치고 찢어지는 괴성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실험 과정에는 오류가 없었다. 부작용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릴리는 태초의 바다를 누비던 고대 인어의 모습으로 정확히 변신했다.
어느 날부터, 릴리의 저택과 별장 근처에서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불규칙적이었고 희미했으나 분명 들려오고 있었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나 주변에 살던 이들은 결국 괴성을 눈치채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넘겼으나, 여러 번 계속해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한 곳에 모여 해결책을 의논하게 되었다. 그동안 주변에는 긴장감과 공포심이 계속해서 돌았다. 결국 사람들은 경찰과 함께 별장의 유리를 깨고 그녀의 집 안을 수색했다. 저택과 별장 곳곳을 뒤졌으나, 괴성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미스터리한 것은 집주인 릴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괴성은 간간이 계속 들려왔다. 집안에서 릴리의 납치나, 혹은 침입자에 대한 증거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집은 늘 그렇듯, 평화롭고 고급진 모습이었다.
결국 릴리는 실종으로 처리되고, 집은 버려지게 되었다. 들려오는 괴성 역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오른 것으로 여겨졌다. 릴리의 집은 먼지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점점 폐허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 근처에 오면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씩 그것은 비명이나 괴성이 아닌, 웃음 소리나 슬피 우는 소리, 노랫소리가 되어 들려오기도 했다. 몇몇 이들은 바다의 유령이 그녀의 집에 올라와 산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릴리의 한때 아름다웠던 별장은 '인어의 집'으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