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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Apr 14. 2024

바다의 보라색 밤

바다 판타지 단편소설

머나먼 세계의 아름다운 바다. 심해 깊은 곳에서 눌려 있던 태초의 기억과 감정들이 피어올라 바다 전체를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이렇게 열두 달마다 돌아오는 '보라색 밤'이 시작되었다. 보랏빛은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을 통해 하늘까지 보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의 빛깔은 서서히 스며들어 노을이 진 직후의 짙푸른 하늘을 보랏빛으로 바꾸었다. 하늘이라는 이름의 벽에 페인트를 칠하듯 보랏빛은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으며, 하얀 구름에까지 알록달록한 빛깔이 묻어 갔다. 푸른빛과 보랏빛, 분홍빛이 뒤섞이고 어우러진 이른 저녁의 하늘은 몽환적이면서도 동화스러운 분위기를 내리쬐었다. 보라색 파도가 노란 해안선과 바위를 적셨으며, 파도를 머금은 모래는 금빛으로 반짝이며 빛을 냈다. 다이아몬드를 뿌린 듯 바닷물 위로 반짝이는 윤슬은 마치 물의 표면에 밤하늘의 별들과 은하수가 비치는 듯한 광경을 보여줬다.



보라색 밤을 맞이한 바닷속에서는 커다란 축제가 열렸다. 온 바다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은 따뜻한 바다와 시원한 바다를 건너가고 누비면서 자유롭게 헤엄쳤다. 바다에서 시작된 보랏빛이 하늘과 땅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바다에 있던 것들이 육지로 쓸려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 바다에 있던 것들 중 대부분은, 바다에 있었지만 육지에서 비롯된 육지의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중 극히 일부에는 바다에서 자신의 것을 육지로 올려보내는 '바다의 것'이 섞여 있기도 했다. ‘바다의 것’은 바다가 육지에게 보내는 선물과도 같았다.




긴 밤이 흐르고 하늘을 감싸던 짙은 보랏빛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새벽의 도착을 알리는 바다의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때에는 보라색이 많이 희미해져 세상은 옅은 분홍색의 베일에 싸여 있는 듯했다. 바닷물과 맞닿는 바위와 해안가는 마찬가지로 분홍색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태양이 곧 얼굴을 드러낼 것을 알리듯, 짙은 색감과 어둠은 서서히 걷히고 조금씩 밝아져 지난 초저녁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새벽은 '보라색 밤'의 마지막 순간들이었다. 태양에게 자리를 넘긴 채 서서히 고개를 숙여 가는 달 아래에는 분홍 바닷물을 흡수하며 반짝이는 바닷가가 있었다. 그곳의 부드러운 모래 위에는 한 여인이 잠에 빠져 있었다. 육지로 몰려와 모래를 간지럽히는 파도는 그녀의 몸을 감싸면서 일시적인 드레스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런 바다의 손길에 안정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달콤한 꿈을 음미하고 있었다. 바닷물의 촉감과 파도에 익숙한 몸을 가진 그녀는 하반신에 기다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인은 인어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아이라였다.



지난밤 바닷속을 누비며 다른 인어들 그리고 바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끝없는 파티를 벌인 그녀는 어느 순간 너무나 지친 나머지 잠에 빠졌다. 얕은 바다를 누비며 산호들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는 결국 보라색 바다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육지로 밀려온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보랏빛 하늘을 날아다니며 날개가 달린 인어들과 입을 맞추는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금발의 머리에 은색의 꼬리를 가진 그녀였지만 '보라색 밤'만 되면 자연스럽게 꼬리는 보랏빛으로 머리는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아이라는 이런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인어였다. 시간이 지나 '보라색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찾아오자 꼬리와 머리의 색깔은 모두 옅은 분홍색과 보라색으로 변했다.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에서도 보랏빛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중 한 마리에서 작은 보라 물방울이 날개 끝에서 빠져나가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물방울은 해변가에 누워 있던 아이라의 볼 위로 떨어졌다. 물방울이 볼을 적신 아이라는 달콤했던 자신의 꿈에서 깨어나 두 눈을 활짝 떴다. 보라색 밤과 새로운 아침의 중간에 걸려 시간을 잇는 징검다리, 새벽의 신비한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보라색 파도와 금빛 모래의 품에 안겨 잠을 잔 그녀의 몸에서는 잠의 기운이 완전히 씻겨 나가 없었으며, 마음은 안정되고 평안한 상태에 있었다. 몸을 계속해서 적시고 쓰다듬는 파도를 눈치챈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주위의 평화롭고 은은한 광경을 둘러보던 그녀는 꼬리를 몇 번 흔들었다. 옅은 분홍빛 사이로 자신의 아름다운 꼬리의 본래 색깔인 은색이 보이는 듯했다. 이 모습을 본 아이라는 얼굴에 미소를 활짝 지어 보았다. 커다란 눈과 높은 코,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라는 바닷속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외모를 가진 인어였다.



아이라는 바닷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과 꼬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헤엄을 치려면 몸을 풀어야 했다. 보라색과 금색 사이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이라의 몸과 마음에서는 알 수 없는 시원한과 편안함,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이라는 좋은 기분을 음미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 다음 꼬리를 이은 허리와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했다. 손길이 반짝이는 물이 묻은 부분을 지나가면서 기분 좋은 찌릿함이 느껴졌다. 그러던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알아차리고서 번개가 머리를 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이라는 자신이 왜 앞서 편안함과 시원함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를 이제야 알아챘다. 그녀가 상반신에 차고 있던 조개 목걸이가 벗겨져 없던 것이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순식간에 아이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당황과 아찔함의 감정은 주위를 빨갛게 물들이는 듯했다. 아이라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라는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고 바다로 떠밀려 오는 과정에서 조개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바닷속에서 여성 인어들은 조개나 해초 등 옷감을 통해 몸을 가리고 치장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시되었다. 아이라는 이런 전통이자 풍습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분이 높고 예쁨을 많이 받는 아이라 같은 여성이 이런 부끄럽고 상스러운 일은 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아이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목걸이를 찾으려 노력했다. 목걸이 없이 다시 바닷속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아이라의 주변에는 바닷물에 의해 깨끗하고 미끈하게 씻기고 단정된 모래들만이 있었으며, 조개껍데기라 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인어가 목걸이로 사용할 만한 조개들은 일반적인 조개들보다 더욱 컸기 때문에, 눈에 쉽게 띌 법했다. 아이라는 모래를 손으로 짚은 채 몸을 이끌고 주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조개 목걸이는 육지가 아니라 얕은 바다 어딘가의 산호에 걸려 있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였다. 아이라는 그런 생각을 한 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바다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부드럽지만 계속해서 몰려오는 물결과 약한 파도가 그녀의 몸을 적셨으며, 더 부드럽게 바다로 기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라는 모래사장에 자신의 목걸이가 있지는 않은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시야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의 시선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이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래사장의 부분, 반짝이는 조개 모양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은 보석과 진주, 해초가 붙고 얽힌 한 쌍의 조개였다. 아침이 되며 밝아지자 그것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으며,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고급진 조개와 화려한 장식. 진주로 엮은 아주 얇은 줄로 묶여 있었다. 그것은 아이라의 목걸이가 분명했다. 자신의 목걸이를 찾은 아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곳까지 기어가 목걸이를 가져와야 함을 기억해 내자 불편함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조개목걸이를 향해 아이라는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태양이 떴는지, 하늘은 이른 아침의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으며, 세상에서 보랏빛과 분홍빛은 다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바위와 산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지 태양은 아이라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목걸이만을 바라본 채 움직이고 있어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몸을 움직여 가던 아이라는 어느 순간, 목걸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뒤쪽의 언덕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근처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인간 모비는 이른 새벽마다 산책에 나섰다. 작고 외로운 집을 떠나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바닷가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에서 밀려오거나 누군가 버린 금화나 쇳조각, 유리병 등을 수집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자신의 병든 할머니를 간호하는 데 사용했다. 오전에도 대장장이와 일을 하고 시장에서 다양한 물건들을 팔면서 돈을 벌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한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가 바다로 향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바다를 사랑하고 동경해 온 모비는 바다 근처에 살았지만 바다로 향하거나 꿈꾸는 것처럼 해양 생물들을 만나고 길들일 수는 없었다. 이후 가난과 병든 가족,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우울감에 짓눌린 그는 어느 날 밤 바다로 걸어갔다. 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한밤중의 바다에서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괴로움과 공포감에 휩싸인 채 힘든 시간을 보냈다. 허나 삶의 끝자락에 선 그가 밤을 새우고 바닷가에서 아침을 마주할 때, 태양이 솟아남과 함께 펼쳐진 아침 바다의 풍경은 그의 마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빛을 통해 본 바닷가와 바다의 모습은 모비가 살면서 본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으며, 그 순간 모비는 자신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바다에 대한 사랑이 다시 물 밀려오듯 마음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때 눈물을 흘려 모래를 적신 그는 이후에도 힘들 때마다 바다를 찾아 산책을 하고 물건들을 주웠다. 바다를 걷는 것은 모비에게는 값진 것을 찾기 위할 뿐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고 평화를 찾기 위한 산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수 년 동안 바다를 걷고, 가보지 않은 해안가를 탐험하고 끝없이 보이는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과 바위를 헤치고 걸었다. 그동안 유리병과 동전을 많이 찾고 주웠고 운 좋은 날에는 금화를 주울 수도 있었지만 기대하던 것만큼의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바다로 향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닷가에서 평온을 얻고, 일시적인 행복을 얻었다. 그의 삶에서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침과 밤에 보는 바다의 풍경 뿐이었다.



이날 아침은 보라색 밤이 지난 이후였다. 모비는 보라색 밤이 지난 아침에는 바다로부터 많은 것이 떠밀려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호 조각이나 불가사리, 작은 조개 등을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 바다는 보라색 밤을 통해 쓰레기나 조각 등 육지의 것들을 다시 육지에게 되돌려주었다. 모비는 보물이나 값진 것을 찾지 못할 때마다 실망감을 느꼈으며, 터덜터덜 모래를 밟으며 바다를 떠나려 했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는 육지의 쓰레기가, 바다가 품고 있던 육지의 쓰레기가 해변에 남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보는 몇 안 되는 아름다운 풍경이, 난쟁이와 인간과 엘프들이 남긴 쓰레기 때문에 더럽혀지고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쓰레기들을 일일이 치웠다. 육지의 쓰레기들을 하나둘씩 치우면서, 모비는 바다와 그리고 자연과 더욱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상을 해주는 이도 없었다. 자신이 알던 깨끗하고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경을 다시 보는 것이 모비에게는 곧 보상이자 행복이었다.



이날도 역시 모비는 바닷가에서 쓰레기를 치우면서 모래를 밟아 나갔다. 그는 이번 보라색 밤에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쓰레기가 밀려온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것을 보고 바다에 남은 육지의 쓰레기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바람이 불어오며 바닷가와 세상에 묻은 보랏빛과 분홍빛이 씻겨 나가면서 저 멀리 지평선으로 날아갔다. 바람을 맞으면서 그것들을 보고 느끼는 모비의 마음에는 따뜻한 보랏빛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모비는 옅지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오른 미소를 얼굴에 지으면서 걸었다.



모비는 그러다 자신이 잘 가지 않는 모래사장을 가르는 언덕과 바위에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왔던 길을 돌아갔을 테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보라색 밤이 지나고 남은 잔상과 흔적만으로도 모비의 마음은 들뜨고 기쁜 상태가 되었다. 그것뿐이 아니라, 모비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마음속의 감정을 통해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모비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지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부름에 대답하듯이 언덕을 넘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오른 그의 눈앞에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태양은 바위와 산맥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뿜어내는 하얀 빛은 그가 알던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다시 돌려놓았다. 공기는 따뜻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간질이고, 그의 숨을 따라 몸속으로 들어와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그런 바닷가를 둘러보는 모비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의 시야에서 작아 보였지만, 환하게 반짝이고 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모비의 관심을 사로잡았으며, 모비는 재빨리 그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모비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모비가 그것에 더욱 가까워지고 그것이 더 크고 자세하게 보였지만, 모비는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밝고 빛났으며, 모비는 그것을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곧이어 모비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한 쌍의 조개였으며, 반짝이던 빛은 그 주변에 놓이고 박힌 보석과 진주였던 것이다. 그것을 본 모비의 마음속에서 피와 함께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올랐으며, 그는 조개를 향해 달려갔다.



바닷가와 모래 위를 누빈 지 수 년이 되어, 모비는 마침내 보물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은 그가 바라거나 상상하던 금화나 금속보다도 몇 배는 특별하고 값진 것이었다. 이것은 그는 상상하지도, 바라지도 않던 특별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모비는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숙여 조개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고급지고 아름다운 보석과 진주를 쥔 그의 손은 덜덜 떨렸다. 그는 시선을 조개로 돌렸다. 이것은 바닷가나 얕은 바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조개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다른 사람이 버리거나 흘리고 가버린, 인간 세계의 물건이 아니었다. '보라색 밤' 이후, 바다가 올려보낸 육지의 물건들 사이에 끼어 있던 바다의 보물이었다. 이것은 육지가 아닌 바다의 것이었다. 특별하고 굉장한 조개였다. 모비의 머릿속에는 보물을 찾았다는 기쁨과 놀라움에 이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모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것을 이용한다면 수 년째 병으로 고생하던 할머니의 병을 치유할 약을 구할 수 있었다. 모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모비는 아직도 보물을 발견한 충격과 놀라움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로, 기쁨과 감사함, 그리고 할머니를 생각하며 떠올린 아련함을 느끼면서 다시 뒤를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이 바닷가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모비는 마음속으로 바다에게 속삭였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강렬하게 뛰는 그의 가슴만큼 바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굵고 뚜렷했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아이라는 바위 뒤에서 작은 인간이 달려와 자신의 목걸이를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간들은 인어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니 모습을 보일 수는 절대 없었다. 아이라와 같은 귀족 인어는 인간들을 조종하거나 최면을 거는 방법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으나, 이 인간의 손에 들린 수많은 쓰레기 묶음, 그리고 조개와 보석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 아이라는 그의 모습에 관심이 끌린 듯, 그를 계속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라는 알 수 있었다. 볼품없는 옷차림과 외모의 인간, 꼬리 대신 두 다리가 달린 인간, 하지만 그의 얼굴과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탐욕이나 욕구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감사함과 감동, 혹은 그 비스무리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인간을 조종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감정을 정확히 읽어내는 데 아이라는 조금 서툴렀다.



하지만 아이라도 곧 알 수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고 느껴지는 그의 기쁨과 뜨거운 감정, 그리고 아이라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감정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그것과 같은 뜨겁고 기본적인 감정은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주변인, 가족을 향한 숭고하고 이타적인 사랑이었다. 아이라는 그것들을 느끼면서, 자신의 마음이 점점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의 감정이 그녀에게 전이될 수는 없었지만, 아이라는 그 감정이 강렬하고 진실된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마치 홀린 듯 집중을 쏟았다.



아이라는 이 인간에게 저 바닷속 조개가, 그리고 보석과 진주가 굉장히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이익이나 필요 이상의 탐욕을 위해 쓰지는 않을 것임을 은연시에 느꼈다. 인간은 곧 그것을 챙기고는 쓰레기 묶음을 다시 들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이라는 바라보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기 전 먼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가장 뜨거운 감정이 느껴졌기에, 아이라는 마치 불에라도 덴 듯, 몸을 황급히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귀에 들리거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아니었지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이라는 잠시 동안 바위 뒤에 같은 자세로 몸을 숨기고 있었으며, 곧 다시 몸을 돌려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시 몸을 적신 바닷물은 다시 따뜻하게 느껴졌으나,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라는 그 인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이라에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진주와 보석이었지만, 그 인간에게는 분명 다른 의미를 가졌다. 기본적인 종족에 대한 것 외에 육지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지만, 그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는 무언가 다름 분명했다. 아이라는 자신이 얕은 바다를 통해 육지에 떠밀려온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이라는 가까운 바다에서 조개껍데기를 새로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조개 목걸이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아이라 본인과 인어들에게는 값비싼 보물도, 목숨을 걸 만한 중요한 가보도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지겠지만 인어들에게는 조금 달랐다. 어차피 마음에 들던 관습도 아니었는데, 목걸이를 잃고 새로운 조개를 찾아 거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인어들이 오지 않는, 얕은 바다를 따라 헤엄쳤다. 비록 다른 시선이나 존재가 있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조개 없이 알몸으로 헤엄치는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부끄러운 듯, 아이라는 손으로 다시 몸을 가렸다.



해초와 산호를 거쳐서 조개들이 널브러져 있는 바다의 초원에 이르자, 아이라는 자신에게 맞는 조개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원하는 조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며, 예전의 것과 비슷한 고급지고 화려한 겉모습을 가진 조개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라는 조개를 손으로 들어 올린 다음 잠시 생각에 빠졌다.



보통 이렇게 다른 것들보다 큰 조개는 안에 진주를 품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아이라는 이전에 자신이 해안가로 떠밀려 오며, 인간에게 보물과 같은 조개를 준 것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대자연과 바다의 의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연중에 기대를 품고 아이라는 조개껍데기를 열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아이라는 생각했다. 애초에 커다란 조개더라도 조개 안에서 진주가 나오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라는 진주가 없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튼튼한 조개 껍데기를 주변에서 찾은 해초와 여분의 실로 엮어 자신의 목에 걸면서도, 바닷가에서 본 인간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왠지 그 사건과 그 모습은 기억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육지에 그런 인간들이 있다면, 육지는 그렇게까지 어둡고 더러운 곳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아이라는 가슴에 새로이 목걸이를 걸고 나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것처럼 육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어느덧 태양이 산맥과 바위도 넘어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하늘과 바닷물은 깨끗하고 푸른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아이라는 그렇게 육지를 보고선 다시 물속으로 잠수해, 바다 아래로 헤엄쳐 갔다.


 


허나 아이라는 알지 못하는 비밀 하나가 있었다. 그녀가 열어제낀 조개 안에는 진주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진주였을 뿐, 조개가 품고 있는 무형의 무언가는 분명 존재했다. 이후 아이라가 조개껍데기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면서, 조개껍데기는 그녀의 가슴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주는 그녀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심장과 결합했다. 아이라가 택한 건 평범한 조개가 아니라, 전 바다에서 얼마 남지 않은 특별한 조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남은, 특별한 에너지이자 연기와도 같은 진주는, 아이라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마음이 되었다. 인간과 육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준 아이라, 육지와 인간에 대한 감정이 생긴 아이라의 마음을 찾아 조개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었다. 진주의 마음을 가진 아이라는 바다와 육지의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소통하며,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진주가 되어, 앞으로 바다와 육지의 사람들을 위해 우아하고 아름다운 은빛 일들을 해낼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아이라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인어들의 왕국을 향해 바다 아래로 헤엄쳐 가는 그녀의 몸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오직 진정으로 선하고 따뜻한 영혼을 가진 이들만이 볼 수 있는 빛이었다.



*

'아이라' : 고대 아틀란티스 언어로, '바다의 선물' 혹은 '바다의 진주'로 해석되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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