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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우리 이혼했을 걸요?]

@당신을 낙형(烙刑)에 처합니다.

by 마담D공필재


우리 아버지는 칠십이 넘어서도 머리가 거의 세지 않았다. 나는 운 좋게 아버지의 유전자가 당첨되어 예순이 넘어서도 염색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다. 물론 흰머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귀밑머리 양쪽이 마치 브리지 한 것처럼 세긴 했다. 하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심지어 멋있다고 해 주는 눈먼 사람도 있었다) 눈에 거슬렸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염색은 집에서 하면 번거롭고 미용실은 깜짝 놀라게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작년 어느 날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집어엎으며 정돈을 하기 시작했다.(나는 정리를 병적으로 못하고 동생은 병적으로 정돈을 잘한다. 그리고 흐트러진 모습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 집이 건 내 집이 건.)

-어? 염색약이네?

언젠가 무슨 이유에선가 호식이가 염색약 세 개를 가져왔는데 쓸모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굴리다가 잊어버렸다. 그것을 찾아낸 것이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동생은 어릴 때 보물 찾기의 달인이었다) 실눈을 뜨고 케이스를 살피던(동생도 늙어서 노안이 왔다. 고소하다.) 동생이

-음, 두 개는 흑갈색이고 하나는 흑색이네? 흑갈색이라… 나쁘지 않아!

중얼거리더니 식탁 의자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앉아 보소!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염색이란 것을 당하게 되었다. 동생이 어깨에 별 몇 개 단 군인처럼 각을 잡고 지휘를 하는 바람에 뭘 어째보지도 못하고 어어어… 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끝이 났다. 생각보다 빨라서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염색을 하고 나니 얼굴에 생기가 있어 보였다는 거다. 음, 좋군!

두 달이 지나니 얼굴색이 다시 우중충해졌다. 그래서 호식이 더러

-여보!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더라고. 해 줘! 이건 흑색이고 이건 흑갈색이야. 흑갈색으로 해줘잉

라고 말했다. 흑갈색으로!!

여차저차 저차 여차한 과정을 거치고 거울을 보았다. 이상하게 어색했다. 내 얼굴에서 뭔가 아주 한이 서린 듯한, 소복만 입으면 납량특집이 될 듯한 창백한 빛이 났다. 그러니까 내 흑단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선인들이 이것을 일컬어 ‘흑단 같은 머리’라고 하였구나! 과연! 스스로 깨닫게 되는 그런 지나치게 새까만 머리였다.

감이 왔다.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있던 팔을 휘저으며 호식이를 다그쳤다.


-여보, 흑갈색으로 한 거 맞아? 아니지? 당신, 흑색으로 했지?

-아닌데, 분명 흑갈색인데? 이거 봐!

호식이가 염색약 케이스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돋보기를 끼고 살피다가 드라이어를 호식이의 배에 정조준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우리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흑색 맞잖아 아아아악! 안경 끼고 보랬지? 아아아악!

-아아악 뜨거워!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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