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

완벽주의자 내면탐구 (2)

by 김제리

만약 결정장애말로 의학적인 질병이라면, 과연 어느 정도여야 진단이 내려질까?

어느 정도여야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고, 고착화되어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스타벅스를 자주 가는데, 브랜드 충성도나 커피맛 같은 일반적인 이유는 아니다. 새로운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 뭘 시켜야 할지, 무슨 사이즈를 시켜야 할지, 어떤 옵션이 있는지, 할인이나 적립은 되는지와 같은 사소한 고민들이 나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다. 어느 정도냐고 굳이 묻는다면, 때로는 음료를 구매하지 않는 결론이 날 정도다. 이런 나에게 스타벅스의 존재는 대체불가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늘 마시던 것과 똑같은 음료를, 늘 주문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문하여, 늘 동일한 수준의 만족도를 얻을 수 있다. 가끔은 관광지에서조차 현지 맛집을 두고 스타벅스를 찾곤 한다.


아이랑 에버랜드를 100번쯤 간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과장의 의미로 100번이 아니다. 에버랜드 어플의 방문기록에 기반하여 3년간 각각 40회/40회/18회를 방문했다. 18회는 올해 횟수이므로 늘어날 것이다.) 물론 집에서 15분 거리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주말마다 똑같은 곳을 찾는 이유를 주변인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새로운 컨텐츠를 검색하고 정보를 모을 생각만 해도 이미 지치는 나로서는 새로운 곳에 가보는 것은 정말 가끔, 멘탈이 아주 좋을 때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직장에 2011년에 입사하여 무려 14년차 근속 중이다. 이직이 잦은 업계 특성상 한 직장에 너무 오래 근무한 커리어를 그렇게 좋게 평가하지는 않는 편에도 불구하고, 이직이라는 엄청난 결정을 스스로 하기 힘든 사람이므로, 이렇게 그냥 계속 다니고 있다.


그렇게 연차가 쌓여서 이제는 단순한 실무보다 결정의 비중이 높은 직급이 되고 보니,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고역이다. 문서작업이나 이메일은 아무리 많이 쌓여도 스트레스 없이 처리할 수 있었는데, 결정해야 하는 일들은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웠다. 결정만 안 시키면 문서는 다 내가 쓰겠다고 동료에게 하소연하고 다닐 정도였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급기야 누군가를 대신하여 결정해줘야 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아이의 미래가 내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울고 싶어졌다. 아이가 다닐 기관을 선택하거나, 치료방법을 결정하거나, 제한된 유년기동안 어떤 경험을 하면서 자라게 할지와 같은 결정은 너무나도 어려웠고 많은 의문과 자책을 남겼다.




완벽주의 성향이 결정을 못하는 이유는 당연히 완벽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결정을 했을 때의 좌절과 자책감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모든 선택은 일장일단이 있다고 머리로 아무리 설득해 봐야, 마음속에는 늘 최고의 선택지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게 미룬 결정들로 인해 나는 아마도 내 인생에서 많은 기회와 경험을 놓쳤을 것이다.


내가 결정장애가 심각하다는 것을 스로 인지한 후에는 결정해야 할 일을 최대한 없애고자 했다. 하루의 일과 중에서 중요도나 우선순위가 낮은 일들을 찾아서 루틴화했다. 아침식사는 고정식이 되었고, 식단도 거의 먹던 것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집안일은 철저히 루틴에 의해 진행되었다. 아이의 방과후 컨텐츠를 고민하면서 괴로워할 틈이 없도록 학원 일정 등으로 월화수목금 일정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나의 일과는 거의 매주 똑같고 나는 그렇게 세팅되어 있는 것에 상당한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 늘 있었지만, 선택의 피로감 대신 다소 지루한 일상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삶에 피해 갈 수 없는 결정들은 늘 존재한다. 최근에는 아이의 초등학교 환경(학군)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할 동네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정말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최종 후보지들은 사실 어떤 걸 선택해도 크게 상관없는, 모두 각각의 장점을 가진 선택지였다. 심지어 이사를 꼭 가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결정을 포기하는 선택지도 가능했다.


나 혼자 살 집을 구할 땐 어렵지 않았는데 가족 구성원 모두를 내 결정에 따라 옮기려니 잘못 결정하여 후회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끊이질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처음 치르는, 무려 6년만의 이사였다.


결국 시간만 질질 끌다가 뭐라도 선택해야 하는 사면초가의 상태가 되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구글에 지혜를 구했고, 일면식 없는 누군가가 결정장애에 사용하라며 추천한 가중평균 의사결정 매트릭스(Weighed Average Decision Matrix)에 의지해가며 지금의 집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를 우울과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그놈의 이사 해프닝을 겪으면서, 나의 결정장애에 대한 몇 가지 행동지침을 만들었다.


1. 간단한 일들은 루틴화하고, 더 나은 대안이 있지 않을까에 대한 의문 금지. 이렇게 루틴하게 살아도 되는가에 대한 죄책감 금지.

2. 결정이 안될 땐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WADM 같은 의사결정도구를 활용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의문 금지.

3. 내가 보기에 동일한 선택지라면 나를 아끼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의문 금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핵심은 의문 금지다. 쉽게 결정하지 못할 때에는 이미 모든 선택지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고, 이에 대한 의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고 해서 더 좋은 선택이 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빨리 결정하고 그 결정을 좋은 선택지로 만드는 데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전체적인 에너지 배분의 측면에서 봤을 때도 더 유익할 것이다.


새 행동지침으로 나의 결정장애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리는 당연히 없다. 어려운 결정들이 술술 결정될 리는 더더욱이 없을 것이다. 인생의 큰 결정들은 책임과 결과가 따르고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의문 금지다. 일단은 결정하고, 뭐라도 해나가다 보면, 회피하고 미뤄왔던 과거보다는 더 많은 경험들로 인생을 채울 수 있겠지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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