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본격적으로 단역 알바라는 거대한 인력 시장에 몸을 던졌다. 단역 알바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엑스트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도 대학 연극 동아리 활동과 영상제작 경험, 수상경력 등이 있어서 엑스트라 중에도 비중이 있는(대사 유무로 비중을 따진다)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집합장소가 여의도 일대 새벽 시간이라 아들은 해가 저 물때쯤 케리어를 끌고 여의도로 향했다. 집합장소 근처에 있는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면서 단역 알바를 했다. 단역 알바를 일찍 마쳤을 경우는 집에 오지만, 촬영이 늦어져 집에 올 차 편이 없으면 또다시 찜질방으로 갔다.
"아빠, 찜질방이 동네 찜질방 하고 많이 달라. 더듬이도 많고, 도독 놈도 많고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아니 한 숨도 못 자."
"도둑놈은 알겠는데 더듬이는 뭐야?"
"자고 있으면 옆에 누워서 막 더듬어. 처음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하지 말라는 말도 못 했어."
"지금은?"
"지금은 요령이 생겨서 벽에 붙어 자다 곁에 누가 오면, '건들면 죽인다.' 한마디만 하면 그냥 가."
"세상이 참 다양하네. 재미있는 세상이야. 단역 알바는 할 만 해?"
"오래는 못 할 것 같고, 일단 현장감을 배우니까 좋아. 한 동안 해보려고. 그런데 아빠, 나 운동화 좀 사줘. 이번 배역에는 운동화를 신고 오라는데 신을 만한 게 없어.
"너 돈 벌잖아."
"일당으로 최저임금 받는데 찜질방에서 자고, 밥 먹고, 차비하면 남는 게 없어. 아빠, 이번 배역은 주인공 젊은 시절을 재연하는 역할인데, 대사도 있고, 단독 샷도 있어. 적어도 십 분 이상은 출연할 것 같아. 잘되면 단역에서 조연으로 한 계단 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들이 장바구니에 담아둔 운동화는 이십만 원이 넘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생일선물로 퉁치는 조건으로 사줬다. 운동화를 받아 들고 좋아하는 아들을 보니 한동안 소식이 뜸해진 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도 단역 알바일을 전문 적으로 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나름 배우라는 타이틀에 취해 20년이 넘도록 무위도식했다. 앞에 무위만 들으면 뭔가 자연을 벗 삼는 선비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친구는 촬영이 없는 날이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우격다짐 술자리를 만들었다. 친구들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고 유명 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친분을 자랑했다. 연예가 뒷 애기를 직접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재주도 있었다. 사람은 유쾌하고 좋지만 항상 가난했다. 집에 갈 때 친구들이 주는 택시비가 생활비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단역배우 일이 좋다는 친구는 좋게 말하면 풍류만을 쫒는 낭만 백수였다. 친구들이 뒤에서 자기 욕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궁금했다며, 그동안 어떻게 지내냐며 전화를 하는 녀석과 아들이 점점 오버랩된다. 나름 조연급 재연배우를 한 아들은 다음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왔다. 새로 산 운동화는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정도로 걸레가 되어 있었다. 아들은 흙 범벅이 된 운동화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조감독이 작품 배경 시대가 1960년대라며 새로 산 운동화를 흙탕물에 넣고 빨았어. 그럴 거면 헌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말을 해줘야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새 신을 신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는데. 일주일도 못 신고 버려야만 하는 불쌍한 내 운동화. 아빠, 진짜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들 다 못됐어. 많이도 필요 없고 아주 조금만 친절하면 안 되나? 그게 그렇게 어렵나? 현장 스텝이나 감독, 배우 어느 누구도 우리를 배우 취급을 안 해. 우리보다 촬영 소품이나 장비가 더 대접받는 것 알아? 비 오면 비닐 쓰여주고, 날이 더우면 열받지 말라고 선풍기 틀어주고, 그러다 보니까 촬영장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도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아. '나는 지금 공부하는 중이다' 속으로 몇 번씩 다짐하면서 참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어."
얼마 후 새 운동화를 버려가며 찍은 드라마가 방영이 됐다. 조연급 단역이라더니 정말 십 분 이상 아들 얼굴이 텔레비전에 나왔다. 아들 얼굴을, 아들의 연기를 내가 텔레비전으로 볼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단역으로 멀리서 지나가는 또는 서있는 뒷모습이라 출연했다고 말하기 민망한 작품들은 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정면으로 나오고, 대사도 있어 연기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이 꽤 있었다. 나름 괜찮았다. 아들은 방송을 보며 단역배우 알바를 그만둔 것이 내심 아쉽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며 스스로 자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쓸 한 줄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두어 달 진행된 아들의 단역배우 알바는 우여곡절 끝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제 아들 방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음악소리만 크게 들린다. 랩을 따라 부르는 것 같다. 저러다 래퍼를 하겠다는 소리나 안 했으면 좋겠다. 아들 방 문만 보면 한숨이 한가득이지만, 이제 또 무엇을 할는지 내가 더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