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향수

by 윤희웅

30년 근무 후 퇴직인데 적어도 플랑 하나 정도는 걸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럴까 했는데 이 과장님이 작은 선물 하나가 더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플랑은 무슨, 웃자고 한 소리야. 플랑보다는 선물이 좋지. 고맙다.


언제 이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듯싶다. 30년을 가족보다 더 자주, 오래 봤던 얼굴인데 막상 내일부터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시나브로 술이 써졌다.

오늘은 술이 좀 쓰다. 술이 쓰면 그만 마셔야겠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내가 한 잔 살게.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택시 타면 금방이야. 말이라도 고맙다.


모셔다 드리려고 일부러 술을 안 먹었다는 이 대리의 말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집 앞까지 왔다.

맥주 한 잔 더 하실래요?

차는?

대리하면 돼요. 그냥 형님이랑 마지막으로 한잔하고 싶어서….

나에 대한 호칭이 형님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이 대리의 팔짱을 끼고 동네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가만 보면 이 대리는 나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스포츠보다 드라마, 영화를 더 좋아했다. 직원들이 휴게실에 모여 주식이나 스포츠 토토 이야기를 할 때 우리 둘은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일찍 결혼해서 연년생 남매를 키우는 것도 같았다. 우리는 정글 같은 사회생활에서 육식동물의 시선을 피해 가며, 같은 초식동물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했다. 가끔 일하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벌떡 일어나 미어캣 흉내를 냈다.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이제 저는 미어캣 놀이 누구랑 해요?

힘들면 전화해. 이제 나 백수잖아.


이 대리는 그동안 고마웠다며 작은 선물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향수였다.

내 몸에서 홀아비 냄새가 났나? 웬 향수?

냄새나서가 아니라 저의 아내가 면세점에서 일하잖아요.

그렇지. 홀아비 냄새나는 거 아니지? 그럼, 나에게 무슨 냄새가 나?

형님은 그냥 따뜻하고, 재미난 냄새가 나요. 일곱 살 개구쟁이 방귀 냄새라고나 할까?

일곱 살 개구쟁이 방귀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궁금하네. 그래, 내가 아마 일곱 살 개구쟁이 때였을 거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가 나를 업어줬어. 아버지 목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아버지 등에 머리를 기댔지. 그때 아버지 등에서 좋은 냄새가 났어. 아버지 등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아버지 냄새를 맡았지.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냄새가, 내 기억 속에 행복하게 남아있지. 그러다 얼마 전 퇴근 할 때였어. 차가 고장 나서 오랜만에 버스를 탔지. 버스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어디선가 아버지 냄새가 나는 거야.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지. 설마 돌아가신 아버지가 버스를 탔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냄새가 분명했거든.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아버지의 냄새를 찾았어. 그 냄새는 내 앞에 앉아있는 아저씨에게 나는 냄새였어. 새카맣게 탄 목덜미에서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 버스 에어컨 바람에 식어 버린 시큼털털한 땀냄새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냄새였어. 아버지의 냄새를 맡은 그날, 나는 많이 울었지. 이 나이 먹도록 아버지의 냄새가 땀 냄새였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아무튼 향수 잘 쓸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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