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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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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Oct 11. 2023

나의 얼굴

 우리가 익히 아는 링컨 대통령의 일화가 있다. 링컨 대통령 고문이 어떤 인물을 내각의 일원으로 대통령에게 추천하자 링컨 대통령이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 얼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고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건 난센스입니다.” 링컨이 답했다. “마흔이 넘는 모든 이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사람 얼굴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거울을 들여다볼 때, 화나고 불퉁한 표정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내면 태도가 그렇게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링컨은, 태어날 때의 본인 얼굴은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며, 본인의 생각과 행동이 표정에 발현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이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얼굴 역시 그 사람의 성품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방점을 찍은 또 한 명이 바로 공자인데, 그의 언급은 더 단정적이다.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공자가 말하길, 마흔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더 볼 것이 없다.) 논어 양화(陽貨) 편     

 인생관을 정립하여 ‘미혹(迷惑)’됨이 없는 불혹(不惑)의 나이를 마흔으로 본 공자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남들에게 미움받을 짓만 하여 주위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은 더 볼 것이 없다고 함으로써 강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면 나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나는 얼굴에 책임을 지고 있을까? 며칠 전 바리스타 학원에서 생긴 일이었다. 바리스타 오전반은 여섯 명이었다. 이름표 덕에 이름은 알 수 있지만 나이는 갸름하기 어려웠다. 특히 여성들은 화장이라는 무기가 있으니 더욱 어려웠다. 20대의 젊은 남자, 여자를 제외하고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두 명, 그리고 돋보기를 쓰고 있는 60대 여성 한 명, 그리고 나였다. 수업 초반부터 내 곁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다가온 60대 여성이 수업을 마칠 무렵 나에게 친구를 하자고 한다. 나이가 비슷해야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여성보다 열 살 정도 어린데 나에게 친구를 하자고 했다.    

 

“제가 몇 살로 보여요?”

“우리 나이에 몇 살 차이 정도는 친구 해도 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몇 살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내년에 칠십인데 몇 살이세요?”

“칠십이요? 그러면 제가 몇 살로 보였어요?”

“60대로 보였는데 아니에요?”     

 

 내가 60도 아닌 60대로 보이다니 어이가 없었다. 나름 젊게 생각하고, 젊게 입고, 젊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궁금한 얼굴을 하며 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제가 60대로 보여요?”     

 

 그들은 가족 오락관 게임을 하듯 이구동성으로 ‘네’ 외쳤다. 나는 내 나이보다 열 살이나 많은 60대가 되었다. 어쩐지 수업 중에 모든 사람이 은근히 챙겨주던 이유가 있었다. 커피를 배우는 어설픈 60대 남자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애쓰는 아빠처럼, 남편처럼, 또는 할아버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제 나이는 아직 오십 중반입니다. 만으로 따지면 오십 초반에 가깝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주민등록증이라도 보여줘야 믿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얼굴에 책임을 못 졌구나. 딸이 얼굴에 검버섯을 빼라고 할 때 뺐어야 했다. 너무 어려 보일 듯싶어 구두를 신었는데 패착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신구 모자를 벗으세요. 할아버지처럼 보여요.”

“원색이나, 밝은 색 옷으로 입으세요.”

“스니커즈나 캐주얼 구두를 신어보세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의 삶이 문제일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했다. 나는 이제 무엇이 될 자신이 없는데…. 나는 참회록을 써야 했다. 신구 모자를 벗고, 야구 모자를 썼다. 아들의 옷장을 뒤져 옷을 꺼내 입고, 구두를 벗고, 스니커즈를 신었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무엇이 된 내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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