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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시빵가게 Feb 13. 2023

197화. 밤 한 마리_이상교



시를 반복해서 읽었더니 혀끝에 "밤 한 마리"라는 말이 자꾸 맴돕니다. "밤 한 마리, 밤 한 마리, 밤 한 마리..." 자꾸 되뇌어지는 이 밤 한 마리가 얼떨결에 입 밖으로 뛰쳐나오면 어떡하지요? 그 밤 한 마리를, 밤이 밤 한 마리 낳듯이 자연스럽게 놓아주지 못해 끙끙거리던 무수한 밤들이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낭비해버린 까만색 색종이도 떠올랐습니다. 밤이 밤 한 마리를 낳듯이 밤 한 마리를 접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접은 밤 한 마리와 같이 놀 수도 있었을 텐데. 살아가는 일에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는, 밤이 두려운 친구들에게 이런 모양의 밤도 있다고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밤 한 마리"라는 신선한 언어를 낳아 한밤중처럼 죽은 듯 정지한 시간을 한 마리의 고양이로, 살아움직이는 활물의 시간으로 유유히 흐르게 하는 시인처럼 말입니다. 


환한 대낮에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느닷없이 마주친 나를 한 마리의 밤인 듯 응시하던 까만 고양이 한 마리도 생각납니다. 신기하게도 "깜깜한 한밤중이 까만 고양이 한 마리를 낳았다"는 신화적인 문장의 주술에 걸려들었는지 자꾸만 태어나는 밤들을 하나, 둘 세다 보니 이 시는 꿈을 접는 까만색 색종이, 밤의 생산성에 대해 일깨워주는 시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상교 시인이 접은 신비한 밤의 꿈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제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즐거운 몽상의 시간을 선물해 준 시인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_ 혜정 (대전에 사는 동시를 사랑하는 독자)



https://blog.naver.com/dongsippang/223003089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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