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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Nov 12. 2023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外)

공개 비공개 그 사이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은 내 가족과 소수의 가까운 친구들만 알고 있다. 약물치료 중엔 누구에게 알리거나 할 여력 없이 그저 버텨내기 바빴기 때문에, 진단 직후 소식을 전했던 단 두 명의 친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어느 날 대수롭지 않게 과거의 한 일화를 이야기하듯, 고되고 고된 여정이 대수롭지 않아 질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OO야, 나 사실...'이라는 말을 꺼내는 상상만 해도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상태가 다 지나고, '그땐 그랬지~ 근데 지금은 멀쩡해~ㅎㅎ'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난생처음 하게 된 완전한 숏컷으로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었다. 약속한 장소에서 나를 본 친구는, 아니, 못 봤다고 해야 하나? 날 봤지만 알아보진 못했다.  코앞에서 두리번거리며 날 찾는 그 친구에게 다가갔다. "야!ㅋㅋ" 

나의 새롭고 과감한? 헤어스타일에 깜짝 놀라면서, 머리 때문에 못 알아봤다고 웬일이냐고, 근데 잘 어울린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를 만나 반가움에 재잘재잘, 업데이트거리를 한가득씩 들고 다 함께 카페로 향한다.


난 언제 내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타이밍을 보고 있다. 고민이다. 얘기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왔는데, 오랜만에 열린 이 즐거운 대화의 장에 세 묵직한 바위를 쿵! 하고 떨어뜨리고 싶지가 않다. 유리같이 연약하고도 소중한 이 순간을 깨뜨리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꼭 만나서 직접 하고 싶었기 때문에,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또 언제 생길지 모른다. 내가 계속 숨긴다면, 그건 이 친구들에게도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미 꽤 늦은 시점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나에게 얘기를 안 해줬다는 사실이 너무 서운할 것 같다.


그 순간까지, 전날부터, 아니, 약속이 잡힌 날부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렸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단련시켰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서,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는 듯, 그냥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난 용기를 내서, 그리고 최대한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아 난.. 사실 좀 많이 아팠었어~ 아니, 엄청 엄청 많이 아팠었어.. ^^;(머쓱)"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난 그렇게 공을 들여 철저히(?) 준비한 반면, 그들은 준비할 시간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 친구들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가볍게 말하든, 무겁게 말하든, 내가 어떻게 말하든 사실 그건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내가 꽁꽁 싸매서 저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이 무시무시한(?) 사실은, 어떻게 전달이 되든 듣는 사람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난 절대 울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암'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전부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시작으로 그렇게 우리 테이블은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아, 이런 걸 원하진 않았는데. 너희에게까지 이 아픔을 전달하고 싶진 않았는데. 역시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내 뉴스를 들은 그들의 심정과 반응은 내 통제 밖이고, 온전히 그들의 것이니까.


카페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는 카페 안에 있던 티슈를 엄청 갖다 썼다. 세명의 아가씨들이 카페 구석에 앉아 잡지도 못하는 모기에 뜯겨가면서, 그렇게 아픔에 울었다가, 상황에 웃었다가, 다시 울었다가, 웃었다가...

"근데 네가 말 안 하면 진짜 전혀 모르겠어."

"응, 나 지금은 완전 멀쩡해. 이제 괜찮아. 등산도 다니는데 뭘!"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얼마나 건강한지,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지,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제 괜찮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건강 얘기, 결혼 얘기, 직장 얘기, 흔한 30대 초반 여성들의 주제들로 한참을 떠들었다. 행복했다.




마지막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병을 밝힌 게. 나의 가족, 가까운 친척, 가까운 친구 7명, 그리고 내가 다니는 병원의 의료진들. 이렇게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친척들이 내 기수까지 알고 있는진 모르겠다. 엄마는 할머니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고, 내가 아프고 나서 일방적으로 엄청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80을 바라보시는 우리 할머니도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신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그 외엔,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불필요하게 광고하고 싶진 않은 마음이다. 알아야 할 사람들, 내 가까운 주변인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난 우리 사회에 '숨어있는' 한 젊은 암환자, 암 생존자, 암 경험자가 되었다.


나의 좁은 생활반경과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 때문일까. 난 또 다른 젊은 암환자를 알지도 못하고, 치료하면서 병원 생활을 할 때 이후론 만난 적도 없다.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알고 지내면 특별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서로 응원하고 도움도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진 않는다. 그 대신, 이렇게 나의 존재를 내가 원하는 선에서 적당히 드러내고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브런치에 글을 쓴다. 나에게 잘 맞는다.


나란 사람을 알기 전에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되는 것. 내가 만나는 누군가에게, 사회에, 세상에 그렇게 나란 사람과 암환자라는 단어가 동일시되어 버리는 게 싫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암에 대한, 그리고 암환자에 대한 이런저런 편견들로 나의 존재가 한 번에 정의되고, 나를 그렇게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의 일부일 뿐, 나의 전체는 아니기 때문에.

암환자여도, 나는 나니까!

암환자가 되기 전에도 나고, 암환자가 되고 나서도 나. :)


근데 다 떠나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누가 봐도 암환자'였던 생활을 호기롭게 청산하고, '누가 봐도 "안" 암환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감사.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드러낼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무한한 감사. 이것이 바로 호사. 그리고 또 다른 '누리는 삶'.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난 모든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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