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제주

2박 3일의 첫 여정.

by 런앤런초이

김영하 작가의 책 ‘단 한 번의 삶’을 이번 제주 여행지에서 읽을 책으로 선택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다. 2박 3일 여행동안 충분히 읽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전 ‘여행의 이유‘를 읽었던 기억과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13년의 시간동안 하지 못했던 아니할 수 조차 없었던 혼자 가는 여행이라 더욱 김영하 작가의 책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생각과 달리 여행지에서 3분의 1 가량을 남기고 돌아왔고 오히려 여행지에서 다 읽어버렸다면 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돌아와서 나머지를 읽은 것 또한 결론적으론 잘한 일이 되었다. 내가 제주 여행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두 아이를 모두 재우고 책상 앞에 앉았으니 말이다.

물론 인스타로 나의 여행기록의 생생함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지금 쓰는 이 기록은 다시 나의 여행을 곱씹으며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버렸을 순간들의 내 생각과 느낌, 그리고 지나고 나서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의미들을 남기는데 가치가 있다.

김영하 작가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남긴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삶이란 내가 기억하는 나와 다른 타인이 기억해 주는 나의 총합일 텐데 내가 기억을 잃어간다면 내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의 모습에 기억되지 않는 나의 삶의 일부가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생각에 더욱 기록하고 싶어지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인을 의식하고 쓰는 행위가 많겠지만 단 한 번뿐인 내 삶을 더욱 내가 주인으로 잘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담긴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가 좀 되려 한다.

폭설예보로 여행일정을 바꾸면서 시작된 나의 제주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했다. 여행 첫날 8시 1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가족들이 모두 깨어나기도 전인 시간에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걸렸다. 조금 일찍 서둘러 나왔는데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사님께 “생각보다 많이 걸리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당연하다는 듯 ”월요일 출근시간이지 않습니까? 그러신다. 그렇다. 나는 일상이 아닌 어쩌다 일어나는 여행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늘 일상의 한 부분일터, 나는 월요일 새벽을 교통체증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기에 몰랐을 뿐이다. 그래도 도착 예정시간을 보니 조금은 여유가 있겠다 싶어 안도했다. 그제야 새벽 동이 트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순식간에 차들이 많아졌다. 다들 이렇게 아침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나도 물론 가끔씩 하는 새벽 달리기를 할 때면 느끼는 생각이지만 매일 이렇게 교통체증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또 한 번 놀랬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들 나처럼 여행을 가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은 혼자 가는 것이기도 하고 저가 항공보다는 나름의 안전성을 보장하는 대한항공을 타고 갔다. 사실 처음부터 대한항공을 타고 가야지 한 것은 아니었다. 저가를 찾던 와중에 대한항공이 특가로 뜬 것이 있어 선택하게 되었다. 다른 저가항공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에 나름 대한항공이면 안전할 거란 판단과 거기다 가격까지 저가항공 가격이라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좌석은 맨 뒷자리 통로 쪽. 특가일만하다.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맨 뒷자리이기는 하나 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내릴 때 앞쪽이 다 내리고 난 다음 천천히 짐을 챙길 수 있어 여유가 있었다. 아니었으면 좁은 통로로 내가 빠져나갈 틈을 찾기 바빴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대한항공 기장님은 운전 솜씨가 탁월했다. 아주 부드럽게 이륙, 착륙을 한다. 대한항공이어서가 아니라 아마 기장님의 수년간 단련된 능력의 차이겠지만 말이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하늘이 너무도 맑다. 어제까지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씨가 엉망이었다고 하는데 역시 나는 선택을 잘 한 여행객이 되었단 확신이 들었다.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맑은 날씨만큼 내 마음도 맑음이다. 공항에서 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곧 만나러 갈 거란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혼자 갔지만 설레는 내 마음과 기분은 내가 잘 알 테니 말이다.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한라산 백록담 등반이기에. 여행 오기 전까지 백록담 등산 콘텐츠를 유튜브로 많이 봤다. 이미 나는 백록담에 한번 갔다 왔다 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고대하고 기대하던 일이었기에 한라산 등반하는 날의 해프닝은 더없이 나에게 회자될 아주 맛깔난 추억의 한 꼭지가 된다.

제주도에서의 첫끼는 고기국수, 공항 근처에 맛있다는 평을 보고 찾아간 곳이다. ‘골막국수’ 늘 그렇지만 평이 높은 곳이 기대하는 것만큼 만족을 주진 못한다. 그래도 고기 잡내 없이 큼지막한 수육 몇 점 올라가 있는 것으로 만족스러웠다. 그 순간 우리 딸이 가장 좋아하고 나도 자주 생각나는 쌍둥이 돼지국밥이 생각났다. 늘 타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그 이유도 고기 잡내가 안 나서다. 물론 현지 사람들은 다른 국밥집을 많이 가지만 말이다. 나도 똑같이 타지 사람으로 그 지역의 음식을 먹어보니 잡내가 없는 것만으로도 왜 만족스럽고 인지도가 높은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평소 아침과 점심 사이 애매한 시간에는 흔히 먹는 브런치를 먹지만 여행을 오니 다른 맛이 있다. 평소 해보지 않는 것을 하는 맛. 두툼한 수육과 국물, 탱글한 우동면이 든 국수를 한 그릇하고 나니 바로 커피와 빵이 땡긴다. 집에서는 배부르다고 못 먹었을 순서인데 말이다.

혼자 오니 노키즈 존에도 갈 수 있다. 사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노키즈 존은 달갑지 않지만 또 혼자 왔으니 이 정도는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다. ‘유지커피웍스’ 카페 외관부터 멋스럽다. 인기 있는 곳답게 사람들이 많았다.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한 커피와 에그타르트를 하나 놓고 책을 꺼내 읽는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귓가로 들어왔다 다시 돌아나간다. 어느 순간 백색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내 이 자리에서 3분의 2 가량을 읽었다. 그러곤 다시 펴보지 못하고 집에 와서 마저 읽었지만 분명 이렇게 틈을 두고 읽은 것은 잘한 일이다. 유지는 제주 방언으로 ‘유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 정원에 유자나무가 많이 심겨있었다. 왜 유자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하고 보니 쟁반에 깔려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1948년 4•3 사건이 일어날 당시 모든 나무들까지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유자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잎이 나오기 시작했단다. 그래서 그 유자나무에서 다시 생명이 시작되었고 연결되어 주변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 카페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연대감. 생명은 그렇게 쉽게 꺼지지 않는다지.

이 부분에서 다른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화병에 꽂혀 있는 꽃이 거의 시들어 버리려고 꽃을 움켜쥐었는데 한 줄기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단다. 마른 잎이 아닌 살아있는 줄기의 생동감을. 그래서 그 꽃 한 송이를 다시 화병에 옮겨 놓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의 시선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꽃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그 꽃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생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버림을 당하는 그 마음이 어떨지. 그 순간 섬뜩해졌다고. 나도 여행 오기 전 거실에 오래 그대로 방치되던 말라가는 화분에 다시 물을 줬다. 죽은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지만 물줄기로 힘껏 물을 빨아들이고선 다시 통통하게 살아난 줄기. 둘째가 그 모습을 보더니 “엄마, 화분이 다시 똥똥해졌어.”식물의 생명력은 얼마나 위대한지 인간보다 경이로울 때가 많다.

카페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여행객이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의도치 않게 듣게 되는 그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는 다들 여행 왔으니 이다음 목적지는 어디로 가지? 모두 한 곳이라도 더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찾기 바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거기서 여유로웠다. 이번 여행은 오롯이 관광이 아니라 나와 보내는 시간이라는 것을.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른 비행시간에 혼자 먹는 저녁을 예약한 곳에 가기까지 무려 5시간가량이 빈다. 뭘 해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달리기를 생각했다. 첫째 날에는 달릴 생각을 못했었는데 갑자기 시간이 많이 남는다는 생각에 이 또한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바로 달리기 좋은 제주도 장소를 검색했다. 산방산과 송악산 사이를 오가는 대략 6 킬로미터의 올레 10코스 중 일부였다. 네비를 검색하니 40분 정도 걸린다. 지체 없이 사계항으로 목적지를 찍고 나섰다.

달릴 생각이 없었기에 옷도 러닝 복장이 아니지만 신발만 러닝화로 갈아 신고 사계항에서 송악산 까지 달리기를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기뻤지만 아무렇지 않게 평소 하던 것처럼 달리고 있는 내 모습도 대견했다. "탁탁 탁탁" 바닥과 부딪히는 발자국 소리가 가볍다. 아름다운 제주 바다를 보며 달리고 있는 나. 정말 멋지지 않은가? 순전히 내 기준에서 하는 이야기다. 다른 누군가가 보면 저기까지 가서 저렇게 달리고 있어? 할 수도 있는 말이다. 나중에 동계훈련 갔냐는 말을 들을 만했다. 생각보다 따뜻한 제주도 날씨에 땀이 흠뻑 났다. 러닝복도 아니었기에 안에 입고 있던 옷이 다 젖었다. 마땅히 갈아입을 곳이 없어 차에서 상의만 갈아입었다. 잠바로 가리며 아주 기교한 자세로 갈아입는다고 힘들었지만 역시 날리고 나면 내 몸 밖으로 흘러 나간 땀만큼 상쾌한 기분이 저장되는 그 느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혼자 오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다. 이 맛을 지금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개운하게 달리기를 하고 나니 출출하다. 그래도 아직 저녁까지는 시간이 남았기에 일몰이 보고 싶었다. 제주 서쪽에서 일몰 보기 좋은 곳을 찾아보니 풍력발전소가 있는 곳으로 신창풍차해안도로가 있었다. 내 마음 어찌 알고 이렇게 검색에서 바로바로 제시해 주는지.. 기가 막힌다.

매일 뜨고 지는 해일테지만 하루라도 같은 해와 풍경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매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오늘이 지나면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더없이 소중해진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 풍경은 아마 더욱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겠지. 바람에 돌아가는 거대한 풍력발전소들이 쭉 이어진 그 장관은 화면에 담기도 힘들 만큼 거대했다. 그런데 바닷속에 우뚝 세워진 그 모습들이 제주 바다와 너무도 잘 어우러져 제주답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신 한라봉 주스도 맛있었다. 제주도라고 특별히 육지와 다른 맛을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주가 주는 아름다움에 취해 그 주스마저 특별했다. 잠시 들른 카페에서 사장님이 물으신다. “혼자 여행 오셨어요? 어제 오셨으면 바람이 너무 불어서 제대로 여행하지 못하셨을 텐데 오늘 오셔서 다행이네요.” “네, 맞아요. 여행 일정을 바꿔서 오늘 왔더니 더욱 좋습니다.” 원래 일정대로 왔으면 누리지 못했을 행복감이 곳곳에서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너무 잘한 선택이야.’라고 칭찬해 주는 것 같았다.

여행 첫날의 마지막 장소이자 내일 한라산 등반을 위한 만찬이라고 할까? 제주 협재에 있는 ‘혼담’이라는 고기를 사장님이 직접 구워주는 오마카세로 갔다. 이번 여행에서 제주도 흑돼지를 꼭 먹고 싶었으나 가장 걸리는 것은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을까? 였다. 다른 음식들은 다 혼자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고기는 달랐다. 지금까지 어떤 고기든 구워 먹는 것은 늘 누구와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경험들이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여행을 오기 전 미리 검색을 했다. 검색창에 ‘제주도 혼자서 고기’라고 검색하는 몇 군데가 나왔다. 블로그 글들을 쭉 보니 오늘 내가 가기로 한 곳이 혼자 가기에 부담 없고 아담하며 조용히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딱이었다. 네이버 예약을 미리 해두었기에 예약시간에 맞춰 갈 수 있었다. 가로등도 환하지 않은 이차선 도로에 밝게 빛나는 가게 간판을 찾았다. 약간의 들뜬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서니 남자 사장님 한 분께서 내가 먹을 고기를 준비해 놓고 계셨다. 내 옆에는 또 다른 혼자 온 여성 여행객이 앉아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거리상으로는 함께 온 것 같았지만 전혀 방해받지 않고 각자의 여행 느낌대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그 여행객은 나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감기가 걸렸는지 코를 훌쩍이며 식사를 했다. 사장님께서 나와 그 여행객에게 번갈아 가며 고기를 구워주시고 이야기도 편하게 건네주셨다. 혼자 갔지만 사장님과 간간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식사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오고 가는 대화에는 전혀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몇 살인지, 어디서 사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몇 명인지 등. 보통 나를 들어낼 수 있는 그러 기본 호구조사 정도의 필요가 없었다. 물론 나의 말투를 보고 내가 부산에서 왔다는 정도는 사장님이 알아차리셨다. 부산에도 친구들이 있다며, 그런데 생각보다 부산 사투리를 안 쓴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사투리를 더 안 쓰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우스웠다. 사투리가 뭐 어떻다고. 내일 한라산을 갈 거라고 하니 혼자서 올라가는 나를 대단하게 말해주신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남들에게 쉽지 않은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본다. 여행을 오기 전 주변 사람들 반응이 다 비슷했기에. 여자 혼자서 겨울산을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백록담을 간다고? 걱정 반,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 반 정도가 적절히 섞인 것 같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힘든 그 일을 내가 별 고민 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이끌었을까? 다들 나이가 들수록 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혼자서 무엇을 하기를 두려워한다. 가족들에게 의지하려 하고 기대려 하고 무언가 큰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내 주변 이들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랬다. 작년까지. 늘 가족이라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편이 혼자 여행 가도 좋으니 혼자 가라고 했지만 늘 딸과 함께 했다. 적당히 어린 둘째의 육아에서 조금은 자유를 얻는, 그러나 딸과 함께 말이다. 나에게 이런 변화를 준 것은 달리기를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달리기를 통해 ’나‘에 대한 통찰이 생겼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들이 마치 어린 아기가 두 발로 스스로 서게 되고 걷게 되는 것과 닮아 있었다. 어린아이에겐 이런 과정이 신체적으로 얻게 되는 자립의 첫 시작이라면 내 나이 마흔 넘어서 찾아온 이 독립은 정신적인 독립이며 자립인 셈이다. 달리는 시간 동안 내가 정한 적당한 고통의 산을 넘으며 나와 끊임없이 타협하고 설득하는 시간이 동반된다. 오롯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줄타기. 김영하 작가도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은 성장과 변화의 동력이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든, 백두대간 종주를 하든, 매일같이 크로스핏 운동을 하든, 끝이 있고 잘 통제되기만 한다면 더 강한 존재로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정말이다. 달리기를 하며 나를 끊임없이 통제했으며 그 과정이 나를 강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 경험이 나를 변화시켰으며 혼자서 가는 겨울 백록담까지 끌고 온 것이다. 무엇이든 해보자는 마음.

“단 한 번의 삶“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사진으로 찍어 둔다. 읽을 당시에는 그냥 마음에 와닿았던 글인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맞닿는 글들이 있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이 구절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된 것은 아마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꾸준함 “과 ”지속“이지 않을까? 달리다 보면 당장의 기록에 성과에 흔들리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이 정도의 결과가 나오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을 때 느끼는 실망감, 속상함 등을 나도 느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 달리기를 1년만 하고 끝낼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나이 70,80이 되어도 달리고 있는 상상을 해 본다. 나는 단거리 주자가 아니다. 장거리에서 롱런을 하고 싶다. 매일 달리지는 못하더라도 일주일에 3~4번 달리는 것도 긴 나의 인생에서 보면 아주 대단한 일이며 이런 시간들이 적절히 쌓이면 아마 십 년이 지난 나에게 ’ 달리기‘는 그럭저럭이 아니라 아주 잘할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니다. 그럭저럭 잘해도 괜찮다. 왜냐고? 난 앞으로 몇 십 년은 더 달릴 거니깐. 그러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다들 50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 이렇게들 말하곤 한다. ”이제 무엇을 새롭게 하기에는 힘든 나이인 것 같아.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몸 상태도 아니고, 어쩜 이렇게 체력이 떨어졌는지. “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무엇을 하기에 못하는 나이는 없다고,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으나 그 사람들이 지나온 40대의 시간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렇게 꾸준하게 매일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하고 싶은 것들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다. 나의 10년, 20년, 30년, 40년의 후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을 적절한 선택으로 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겠지?

”혼담“ 사장님께서 혼자 제주도 와서 달리고, 백록담 등반을 한다는 이야기에 ”동계훈련 오셨어요? “라는 말이 여행 내내 나에게 맴돈다. 그 말이 기분 좋게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에는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다. 몸도 마음도. 내가 어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그런 훈련말이다. 아주 미비해도 괜찮다. 어제보다는 나은 나이기에.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나서는 내 발걸음에 힘이 실려있다. 나만 아는 나의 당당함.

나의 첫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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