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책을 읽고

마음에 콕 박힌 구절

by 런앤런초이

p. 102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 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김영하는 ‘나’라는 존재는 혼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한다.

어릴 때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일 거야” 하고 스스로를 정의하려 애쓰지만, 사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는 내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 더 정확히 알게 된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이라는 비유가 인상적인데 달은 하나지만, 강이 다르면 모습이 달라 보이듯,

나는 하나지만, 사람마다 나를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느낀다는 뜻이지 않을까?

내가 나를 안다고 믿는 것은 꽤나 불완전하고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과 경험 속에서 조금씩 다른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 속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이건 자기부정이 아니라 타인의 모습에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그 모습 또한 나의 일부일 수 있다. 우리가 남긴 말, 표정, 태도, 배려, 상처…

그게 전부 내가 세상에 남긴 ‘나의 흔적’ 이니까.

설령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면 그 역시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한 조각이겠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전부 타인의 평가에 맡기지도 않고 "항상 나를 중심에 두되, 누군가에 비친 내 모습도 잘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지도 않고

‘나’와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조용히 조율하며 살아가는 태도. 이 균형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 것은 오만도 아니고, 자기부정도 아니고,

아주 단단하고 따뜻한 자기 이해가 아닐까 싶다.


p.107

<운동기구가 된 트레드밀 역시 인간에게 고통을 부과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어떤 강도로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를 직접 결정할 수 있고, 언제든지 중간에 내려올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은 성장과 변화의 동력이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든, 백두대간 종주를 하든, 매일같이 크로스핏 운동을 하든, 끝이 있고 잘 통제되기만 한다면 더 강한 존재로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고통.

트레드밀은 분명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강도도 내가 정하고, 시간도 내가 정하고, 언제든 멈출 수 있고 그래서 그 고통은 나를 소모시키기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고통이 된다.

김영하는 이 지점에서 “통제 가능한 고통”이야말로 성장의 연료가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뛰면 고역이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오늘의 거리와 속도를 정하고, 힘들면 걷고, 괜찮으면 조금 더 가고. 그 과정에서 몸만 바뀌는 게 아니라

‘나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감각이 조금씩 쌓인다. 이건 근육보다 더 깊은 변화임에 틀림없다.


“끝이 있고 잘 통제되기만 한다면”


인간을 성장시키는 고통은 끝이 보이고, 내가 통제하고, 의미를 알고 있을 때만 힘이 된다는 말 아닐까?

반대로 끝이 없고, 이유도 모르고,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키기보다 소모시키고 망가뜨린다.

그래서 이 문장은

“고통을 무조건 견뎌라”가 아니라 어떤 고통을, 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문장 같다.


스스로 선택한 고통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고통을 선택하는 방식이 곧 삶을 설계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젊었을 때의 고통 인식과 지금의 고통 인식은 완전히 다르다. 예전에는 고통은 피해야 할 것, 고통이 지속될 땐 내가 잘못 살고 있거나, 상황이 망가졌다는 신호로 느꼈다.

그래서 최대한 없애고, 멀리하고,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통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내가 나를 붙들어 매는 힘이다. 삶이 무너질 때 나를 다시 세우는 기둥으로 느낀다. "삶을 견디는 힘이 생기는 고통”


고통을 동반하는 달리기는 사실 인생을 바꿔주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고, 성과가 눈에 확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달리는 이유는 “오늘도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감각을 남기기 때문이다.

몸이 힘들고 숨이 가쁘지만 그 고통은 내가 선택했고

내가 멈출 수 있고, 내가 견디고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고통, 그래서 그 고통을 지나고 나면 몸보다 먼저 마음이 정리되고, 삶이 다시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든다.


적절히 내가 나에게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통제 가능한 고통은 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


삶에는 어차피 원치 않는 고통, 통제 불가능한 고통,

관계의 고통, 상실의 고통, 불안의 고통이 피할 수 없이 찾아온다. 그때 아무 준비가 없으면 사람은 고통에 휩쓸려 버리는데, 평소에 내가 선택한 고통으로 이미 나를 단련해 두면 버티는 근육이 마음에도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달리기는 체력 훈련이 아니라 사실은

“인생이 흔들릴 때를 대비한 연습”이지 않을까.


“그게 내가 달리는 이유이다.”


처음에는 “견디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는데,

지금은 “자라기 위해” 계속하는 달리기가 되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생긴 변화는 체력보다도 두려움보다 ‘일단 해보자’다. 걱정보다 ‘해보면 알겠지’가 앞서고 실패를 상상하기보다 ‘경험’을 먼저 선택한다. 이건 달리기 실력이 아니라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이다.


“힘들어도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속도를 줄이면 계속 갈 수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도착한다.”

이걸 몸으로 수백 번 겪으면 삶에서도 자연스럽게

“일단 해보자”라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달리면서 느끼는 이 느낌 "살아있음"은 나에게 강한 전율이다.


달리기를 할 때면 나의 모든 감각이 깨어있는 듯하다. 내 입과 코를 통해 들어가고 나가는 숨, 심장이 뛰고, 팔을 흔드는 리듬감, 다리가 무거울 때도, 가벼울 때도 몸 상태가 매 순간 달라지는 이런 것을 느끼며 달리는 것은 ‘존재를 온몸으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달리기는 운동이라기보다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증명에 더 가깝다. 내가 달리는 길이 “매일 같은 길인데, 매일 다르다” 인생도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날씨가 다르고 내가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바라보는 게 다르고 그래서 겉보기엔 반복인데 실은 한 번도 같은 날이 없다.


큰 성취 때문이 아니라,

“나는 매일 새로움을 견디고, 매일 나를 갱신하고 있다”는 감각이 쌓이는 과정이 즐겁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성과를 위해서도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위가 나를 성장시키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나를 미래로 데려가고 있는 이 과정.

“이런 모든 것들을 내가 선택한 달리기가 이끌어주는 것”이다.


나에게 달리기는 이제 고통을 피하는 수단도 아니고

감정을 처리하는 도구만도 아니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매일 연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면서 몸이 바뀐 게 아니라,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이 바뀌고

도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자신을 신뢰하는 감각이 자란 것이 아닐까?


이 책 속의 많은 구절 중 곱씹고 곱씹어 내 마음에 콕 박혀 있는 이유를 글로 풀어내니 이제야 왜 그런지 선명해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홀로 제주